예전에 썼던 감상글들을 읽어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게 있어서 복구해봅니다. 3년 전 이맘 때 썼던 글입니다.(2006년 10월 18일) 많은 글들을 읽었고, 훌륭한 글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 중 하나에 대한 감상문. 걸리는 문장 약간만 수정했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작가 : 류세린.
연재장소 :
조아라. 끝나지 않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이 생겨서 한 권 한 권, 한 편 한 편을 기다리고 있는 경우에는 이것저것 쓰긴 하더라도 팬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말하자면 일희일비하는 팬심을 쓰는 게 보통이고(류빈 너무 멋있어, 히사노 하악하악 같은 종류의 이야기가 됩니다-_-), 작품을 보는 것으로 1회 감상을 마친다고 하면,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비평을 쓰는 것으로 2회 감상이 완료되기 때문이죠. 어떤 의미로는, 그 작품을 내 안에서 완결짓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나지 않은 작품에 대해 이것저것 써보고 싶어진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작품이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감상문을 쓸 만큼' 재미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는 것. 종종 하는 일이고,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작가도 기분 좋고, 그 감상을 보고 괜찮은 작품을 접할 기회를 얻은 사람도 좋고, 그 작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되는 자신 역시 좋은 것이니까.
두 번째는 이 작품을 어떻게든 내 속에서 정리하지 않으면, 머릿속이 꽉 차버릴 것 같다는 위기의식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작가의 뜰에 방문했던 게 10월 14일 저녁, 작심하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한 것은 15일 저녁, 1회 완독한 것은 16일 새벽, 그리고 끙끙거리며 1회 더 완독하고 난 것이 바로 지금. 빨리 어떻게든 정리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영향 받아 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두 번째 이유죠.
각설하고.
따라서 이 글은 작품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소개/감상/비평의 혼합물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읽는 분들이 조금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고, 조금 난잡하게 뒤섞인 글이 작품에 누가 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1. 조금 다른 이계진입물. 여성 작가의 이계진입물은 그리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판타지 소설에서는 더욱 그렇고요. 생각나는 건 임주연님의 '서랍 속의 어드벤처'와 안소연님의 '엘야시온 스토리' 정도군요. 둘 다 주인공이나 배경 설정 등에서 꽤 독특한 맛을 갖고 있는 괜찮은 작품들이었지요. 서랍 속의 어드벤처가 보여준 주인공의 독특함이나, 엘야시온 스토리의 반전은 꽤 높게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 미친 여신의 정원사들 역시 일반적인 이계진입물과는 좀 다릅니다. 일반적인 '이계'가 '현실도피' 내지 '욕망을 달성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에 비하면, 이 작품에서의 이계는 '멋대로 들이닥친 폭력'입니다. 주인공인 류빈과 히사노는 각각 비현실적인 성격과 능력을 부여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런 이계에서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닙니다. 이계 역시 독자적인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느닷없는 침입자인 류빈과 히사노가 달가운 존재라고는 할 수 없고요.
욕망 달성을 위한 이계는 엇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불순물에 대해 그리 엄격한 존재가 아닙니다. 전입자가 그 세계의 인간과 같은 모습을 했다거나, 너무 비범해서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그냥 내버려두죠. 배타성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반면에 이 작품에서의 이계는 주인공들에게 매우 배타적입니다. 언급한 것 같은 보호 수단이 없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 갔을 때 생기는 문제들이 그대로 따라오죠.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고, 스스로의 신변을 지킬 방법이 없고. 욕망 달성은 둘째치고 생존부터가 문제가 되는 어려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 이 소설의 첫 부분입니다.
현실과 이계라는 두 개의 세계가 있고, 그 두 개의 세계가 각각의 법칙을 가지고 존재하며, 쉽게 이물질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은 초반부에만 잠깐 나오고 사라지는 난관이 아닙니다. 에릴이라는 이계의 인물이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참가하면서 류빈과 히사노는 이계에 대해 어느 정도 접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갭이 쉽게 줄어들지는 않지요.
이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비난하고, 긍정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계라고 하는 소재를 레벨 999999의 만렙 치터가 돌아다니는 게임 필드와 똑같이 다루는 작품들에 질려 있는 사람에게 좋은 치료약이 될 법 합니다.
2. 독특한 세계관. 하이 판타지라고 하는 것은 '유사 중세'라는 환경을 즐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한국에서의 판타지는 대부분 하이 판타지로, 게임+무협+일본문화+서양문화를 기반으로 뒤섞이며 발달해 왔습니다. 물론 우선적인 원초체험은 역시 '동화'라고 해야겠죠. 창검을 높이 쳐든 기사나,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이나, 크고 아름다운 드래곤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은 그 원초체험에 기반하는 바가 큽니다. 요즘에는 MMORPG가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지만.
반대로 말해, 한국의 판타지 소설은 저런 기초 설정을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우선 원초체험+간접 경험+관습이 섞인 세계를 베이스로 만들어놓고, 취향에 따라 그 설정의 일부분을 적당히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어떤 목적성을 갖고 세계 자체를 조형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은, 이런 소설이 지정된 세계 내에서 어떤 쾌감을 줄 수 있는가에 집중한다는 뜻이 됩니다.
무협을 보세요. 어떤 작가는 인간적인 드라마에, 어떤 작가는 통쾌함에 목숨을 걸지만, 그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세계의 형태 자체를 바꾸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무협 정도는 아니라도, 판타지 역시 배경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장르는 아닙니다. 원초체험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이야기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제한된 배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판타지보다도 SF에 흔한 감성입니다.
이 작품, 미친 여신의 정원사들은 독특한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그 독특함은 실로 현실적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심플한 상상에서 나옵니다. SF에서는 매우 자주 나오는 소재일 거예요. 이 작품에 대한 감상에 자주 언급되어 있는 특징이지만, 여기서 직접 말하는 건 그만두겠습니다. 작중에서도 현재 연재된 분량의 절반 이상(책으로 치면 3권~4권 가량?) 가야만 설명되기 시작하니까, 될 수 있으면 읽어서 아는 쪽이 즐거울 거예요. 비슷한 소재를 어떤 순정만화가가 다룬 적이 있는데, 매우 형편없는 결과물이라서 사람을 참으로 짜증나게 했었죠.
어쨌든 그 핵심이 되는 소재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조립한 결과, 작중의 '이계'는 정말 묘한 공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작가는 우선 이계의 주민인 에릴의 시점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거기에 현대의 주민인 류빈의 눈으로 그 내용을 재차 검토합니다. 생경한, 혹은 거부감이 생길 수 있는 설정을 전달하기 위한 비교적 균형잡힌 태도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의도대로, 이계는 낯설고 폭력적인 공간이 됩니다. 등장인물들만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그렇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분은 아마 두 종류로 나뉠 텐데, 양쪽 모두에게 유쾌하지 않은 곳이 되죠.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려는 주인공들이지만, 초반부의 단순명료한 생존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문화적 문제가 찾아오는 겁니다.
1번에서 언급했다시피, 작가는 두 세계 사이의 갭을 쉽게 좁히게 놔두지 않습니다. 어느 한 쪽에 가볍게 흘러들어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요. 따라서 세계관이 밝혀지면 밝혀질 수록, 후반이 되면 될 수록 이계는 더욱 배타적이고 위험한 공간이 됩니다.
3. 이질적인 캐릭터들. 주인공 중 한 명인 한류빈은 한국인으로 냉철하면서도 뜨거운 소녀입니다. 다양한 격투기에 통달해있고, 상황판단이 빠르고 매우 신속합니다. 말투가 거칠고 과격합니다.
다른 한 명인 야마노우치 히사노는 소극적이고 연약한 소녀입니다. 류빈과는 반대로 상황파악이 느리고 둔합니다. 이지메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정 조건이 되면, 압도적인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명인 에릴은 두 사람의 중간자적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소극적은 아니지만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고, 스스로도 그 입장에 만족하고 있는 듯 합니다.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이 살고 있던 '도시'로 되돌아가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입니다. 이계의 이질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언급했으니 우선 에릴에 대한 건 넘기도록 합시다. 그녀는 작중에서 이계의 가이드, 설명자, 그리고 대변자로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계 안에서는 비교적 일반인입니다.
문제는 류빈과 히사노입니다. 둘 다 이질적인 인물인데, 그건 단순히 이계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류빈이란 소녀는 이상할 정도로 상황 파악이 신속하고, 히사노는 이상할 정도로 연약합니다. 류빈은 다양한 종류의 격투기를 통달한데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기질(나보다 강한 녀석과 만나러 간다!)도 갖고 있는 반면, 히사노는 연약하기 그지 없지만 특정 조건에선 류빈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해집니다.
그녀들의 과거 역시 그렇습니다. 류빈은 그 나이에서 갖고 있을 법한 수준 이상의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고, 히사노가 당했던 이지메는 지나치게 음울하고 퇴폐적입니다. 둘은 어째서 자신들이 이계로 오게 된 것인지 모르며, 아주 쉽게 자신들이 있던 곳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과거 회상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현실'은 그리 현실감 있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마치 두 사람의 현실 역시, 또 다른 '이계'인 것처럼 말이죠. (이 부분은 코드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후술합니다.)
독특한 세계관만큼이나 독특한 주인공들은, 세계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미스테리한 면들을 숨기고 있습니다. 매력적이지만 기묘하고, 사랑스럽지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충돌하는 세계가 자신의 법칙을 꺾지 않는 것처럼, 이 인물들 역시 자신이라는 형태를 쉽게 바꾸려 들지는 않습니다. 소설이란 본래,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4. 정교한 사건 구성, 세심한 문체. 이야기 중간 중간 벌어지는 사건이, 과수원의 나무가지처럼 펼쳐지는 작품이 있습니다. 풍부하고 다양한 소재가 있고, 그것들을 즐겁게 받아들이게 하는 작품이죠. 반면 이 작품은 일점집중형입니다. 조금 돌아가는 듯했던 길도 결국에는 연결되어 가는 구조죠. 완결이 되지 않은 탓에 아직 그 결말이 잡히지는 않았습니다만, 앞서 나왔던 사건이 뒤의 사건과 착실히 연결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지나갔던 장면이 인물의 과거를 설명하는 중요한 복선이 되는 식으로.
배경과 인물 역시 동일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이계에서 드러나는 폭력적인 부분을, 주인공들은 조금씩 다른 형태지만 대부분 이미 경험하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과거 역시 그리 밝지는 않고, 세계관의 음울함과 조금씩 뒤섞여 있습니다. 엄청나게 크다고 할만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으면서도, 작품의 색이 점점 더 진해지는 것은 이런 정교한 구성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묘사력이나 문장력 역시 인상적입니다. 인물의 대사처리를 특색있게 하기 위한 노력도 엿보이고, 긴장의 순간을 포착하는 솜씨도 훌륭합니다. 속도감이 있는 문체는 아닙니다만, 순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이 좋다고 해야겠죠. 전반적으로는 정적인 분위기지만, 지리한 느낌을 주지 않게 잘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유머도 발군이고요.
5. 어두운, 백합. 백합은 본래 소녀들의 교감과 감정을 중시하는 장르였다고 합니다. 최초에는 여성향이었다고 하죠. 하지만 현재는 남성향 레즈물과 섞이고, 동일한 단어에 여러가지 의미와 해석이 담기면서 묘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분위기 역시 좀 묘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선 주연이라 할 세 사람이 모두 여성입니다. 나이도 10대 중반~후반으로 비슷하죠. 류빈은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히사노는 수동적으로 따르는 모습을, 에릴은 둘 사이에 서서 중간자적 역할을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콘티 나오고 에로신 들어간 다음 모자이크 그리고 있을 법한 상황이죠. (죄송, 잠깐 침 좀 닦고)
다만 그렇게 쉽게 이야기가 돌아가진 않습니다. 류빈은 '넌 몰라도 난 이반 아니거든!'을 반복하고 있고, 히사노는 소극적인데다 마운트 기술을 모르고, 에릴은 어디까지나 중간자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니까요. 농담 제하고 말하더라도, 자신들의 색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이 인물들이 타인을 어느 정도 이상 받아들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백합의 원래 의미로 돌아가서, 바로 그런 인물들이기 때문에 백합은 성립합니다. 미묘하게 거리를 재고, 서로의 관계를 생각하고, 어떤 순간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게 되는 복잡한 감정들이 세심하게 묘사되고 있거든요. 소녀 두 명이 있을 때 그 입술의 거리를 재는 것만이 백합이라고 생각하는 이 어리석은 아이를 용서해주세요, 백합신님. ㅠ_ㅠ
몇 번이고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 않습니다. 주인공들 사이의 따뜻한 마음 교환이 좀 마음을 풀어줍니다만, 그 사이는 언제라도 갈라질 수 있을 법한 위기감이 놓여 있습니다. 이야기 중간 중간 제시되는 사건들이, 마음이 한 순간 엇갈려 생기는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탓도 있고요. 주인공들의 감춰진 과거 역시 그리 따스하지만은 않아서, 조금씩 과거가 드러날 때마다 발 밑을 메워가는 광기를 느끼게 할 정도입니다.
6. 깊고 음울한, 러브스토리. 위에서 언급한 '백합'의 분위기와는 좀 별개로, 이 작품은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야기가 러브스토리라고 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기면 대부분 통하는 게 이 이론이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감정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작품은 어쨌든 러브스토리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반대로 우기면 인간과 인간이 관계 되면 그게 무슨 감정이든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각설하고.
이 작품의 분위기는 어둡습니다. 독특한 세계관에 있을 수 있는 비극들을, 작가는 될 수 있으면 전부 다 언급하려고 합니다. 둘로 나뉜 세계는 좁혀질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등장 인물들의 상처가 크고 과거가 아픈 탓에, 이야기는 절대 밝아지려 하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인간을 묘사하는 것은 힘겹고 우울한 작업인데다 광기를 수반합니다. 섬세한 문체는 그 아픈 부분도 정성들여 묘사하려 하고, 그 비극성을 정교한 구조의 플롯이 뒷받침합니다. 매우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가 될 것처럼 보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모든 특징과 장점이 하나로 집중되어, 불길한 미래를 암시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브스토리가 아니라곤 할 수 없죠. 인물 하나하나를, 그 인물과 다른 인물의 관계 하나하나를 공들여 묘사하고 있으니까요. 광기로 보일 정도로 격한 마음의 끌림을 중시하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관계에 집중하는 이상, 이 작품은 러브스토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교감하는 이야기는 더욱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불안한 유예, 혹은 정말로 파멸적인 감정을 묘사하기 위한 준비처럼 보이더라도.
어느 정도의 분량이 남아 있는지,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독자로서는 너무 어둡지 않은 이야기로 끝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울하게 이어져 가던 이야기를 한 순간에 뒤바꾸는 반전의 미학이 작가의 길이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7. 코드의 문제. 이 작품은 독자를 껄끄럽게 만드는 문제를 두 개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계'이고, 하나는 '현실'입니다. 이계의 세계관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언급했습니다만, 현실이 어떤 문제가 되느냐면……
일본입니다.
주인공인 류빈과 히사노는 일본의 여고에 다니고 있습니다. 기숙학교입니다. 흔히 말하는 부잣집 아가씨들이 다닙니다.
음험하기 그지없는 이지메가 등장합니다.
히사노는 작중에서 몇 번씩이나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범상치 않은 과거와 맞물려 현실은 매우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 깐깐한 자들~ 싫으면 보지마~ 하고 넘어가면 그걸로 끝이겠지만, 가능하면 많은 분이 봐 주셨으면 하는 생각에 몇 마디 적어봅니다.
첫 번째, 이유가 없는 설정은 없습니다. 작중에서의 '이계'가 까탈스러운 곳인 것처럼, '현실' 역시 어떤 목적을 위해 재편되어 있는 곳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실의 단어가 매우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거나 하는 장면이, 그것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작가와 독자는 대부분 어떤 코드를 공유합니다. 이 작품의 경우 작가와 독자층이, 일본 학원물이라고 하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드래곤 유희라는 개념이 어느 순간인가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이 경우도 그렇습니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학원물에서 막대한 권력과 재력을 가진 학생회장 캐릭터가 나오면 매우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코드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취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부분이 모여서 작가라는 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편식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맛은 변합니다.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던 음식이라고 해도, 어느 사이엔가 좋아하게 되어 있는 경우가 생기는 것처럼요. 내키지 않더라도 한 번쯤 도전해 보면, 뜻밖의 재미있는 결과가 생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8. 단점들. 특징, 장점을 주로 언급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장점과 단점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시리라 생각하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1) 생소한 분위기 - '이계'가 욕망 달성의 대리공간이라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도피재로서의 성향이 강한 물건이니까요. 슬슬 질려서 다른 걸로 바꿔볼까 생각하고 있다면 모를까, 익숙한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즐겁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 편을 가르는 세계관 - 잘라 말해서 세계관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세계관의 정립과정에 대해서 불만을 품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갈려 있는 두 개의 진영과 그 일그러진 모습을 비교적 고르게 묘사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런 노력으로도 커버를 못할 만큼 불쾌해 하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3) 이질적인 캐릭터들 - 이 작품의 인물들은 많이 독특하고, 조형에서도 종종 극단적인 면을 보입니다.
(4) 느린 전개, 복잡한 구조 - 소설의 템포가 많이 느립니다. 소설이라면 대략 6~7권 정도를 연재했는데도 전개 속도는 여전히 느린 편. 플롯 구조도 복잡하게 짜여져 있는 탓에, 경쾌하게 읽히지 않습니다. 인물의 사고, 독백, 대화 등에서 언급된 내용을 즉시 설명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암시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답답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5) 어두운 백합 -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백합에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이 합해지면 좋아할 사람의 비율은 더 감소하겠지요.
(6) 음울한 이야기 - 정말 우울하게 끝나면 저도 슬플 겁니다.
(7) 코드의 문제 - 2번과 더불어 가장 걸리는 부분이 많습니다. 취향의 문제가 되겠지만, 취향의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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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인지 소개인지 비평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글이 되었습니다.
이 부족한 글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단점이 이것저것 걸리시더라도, 조금이나마 흥미가 생기셨다면 꼭 읽어보세요.
이 작품은 현재 연재중지 상태입니다.
마지막 연재글이 올라온 것이 2008년 4월 30일, 연재중지를 하게 된다는 공지가 올라온 것은 2008년 6월 30일. 166편, 책으로 따지면 약 9~10권 정도 되는 분량이 연재되었습니다만, 이후 연재 재개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한 계절에 한 번 꼴로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다음 편이 연재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고요.
사랑하는 글입니다.
함께 사랑해 주시고, 같이 죽어가실 분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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