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이야기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났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는,
만우절 거짓말 한 토막입니다.
1.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침구는 하나같이 새것이었고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몸을 일으켜서 주위를 확인해보자 고급스러운 건 침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방 안에 놓인 가구들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모두 간직한 초 고급품이었다.
“무슨 왕궁에라도 와 있는 걸까.”
자기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어쩐지 멀게 느껴져서 조금 갸웃했다. 신기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온 것 같은데. 잠에서 덜 깨서 메마른 목소리가 나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방 한 쪽엔 고풍스러운 가구들 사이에서도 튀지 않게 배치된 소형 냉장고가 있었다. 엉거주춤 침대에서 나와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을 한 통 꺼냈다.
꼴깍꼴깍꼴깍. 원샷.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흐르면서 몸이 으스스 떨렸다. 이 서늘함이 멍한 머리를 낫게 해주길 기대했지만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았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방 안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방에는 문이 둘 있었다. 창가 반대쪽에 있는 커다란 문과 벽 구석에 설치된 작은 문.
작은 문을 열자 그 안은 개인 욕실이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수온을 조절한 다음 세안을 했다. 타월로 물기를 닦아내고 세면대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 비친 것은 파란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눈에는 묘한 장난기가 어려 있다. 애교가 많다고 해야 할까, 표정이 다양할 것 같은 얼굴이다.
생긋 웃으며 말해봤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대답해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밖으로 나가야겠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질문해야겠다.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아니, 철학적인 담론을 하자는 게 아니라, 내 이름이라든가 주소지라든가…….
큰 문이 벌컥 열렸다.
두 명의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소녀는 1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풍성하게 웨이브진 머리카락과 부드럽고 통통해 보이는 뺨이 매력적인 소녀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이쪽의 기분까지 기쁘게 만든다. 지금은 어쩐지 조금 가라앉은 표정이었지만.
다른 소녀는 대조적으로 훤칠한 키였다. 170cm를 넘을지도 모르겠다. 훤칠한 키나 진지하고 엄격한 시선과 달리 아직 어린 티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얼굴. 머리카락에는 살짝 붉은 빛이 감돌았다.
작은 소녀가 내쪽을 향해 물었다.
“카란 씨? 괜찮아? 기억 멀쩡해?”
적어도 자신이 누군지를 찾아 끝없는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 아무 것도 기억 안 나.”
큰 소녀가 무척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2.
작은 소녀의 이름은 재희라고 했고, 큰 소녀의 이름은 키아라고 했다. 믿을 수 없지만 둘은 동갑이었다. 재희 쪽이 동안……이라기보다는 상당히 미성숙한 느낌이었지만.
재희와 키아는 번갈아가며 나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름은 카란. 인간은 아니고 바이스Vice라는 이상한 종족. 자신을 향한 타인의 애정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 두 소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잠깐만, 나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키아가 답했다. 여고생답지 않게 딱딱한 말투가 그녀의 습관인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 누군가가 내게 애정을 줘야 하는 거잖아?”
“어떻게 살다니? 그야 우리들이…….”
“같은 여자끼리라도 상관없는 거야? 살아가는데 중요한 문제니까 확인을 해 둬야 하잖아.”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재희가 갑자기 환한 미소를 띄웠다.
“응. 당연하잖아. 애정에 남녀노소가 어딨어? 카란 씨랑 키아, 백합이었어!”
“무, 무슨 소리를……!”
키아가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냈다.
“쉿! 카란 씨가 혼란스러워하잖아. 기억상실이라 어지러울 텐데 더 헷갈리게 해야 해?”
키아는 그 말에 잠깐 나를 바라보고, 안절부절 못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나를 보고, 결국 고개를 숙인 채 ‘네’라고 말했다.
“내 눈앞에서 당당하게 사기극이 펼쳐지는 것 같은데.”
내가 찌르자 재희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백합이라는 건 여성끼리의 러브리한 관계를 말하는 거거든. 속어, 가 아니라 은어구나 은어! 키아는 그런 거 좀 부끄러워해.”
“그래? 예쁜 말인 것 같은데. 어쩐지 청초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들고.”
“더 자세히 파고들면 좀 많이 복잡하지만, 아무튼 사람마다 백합에 대한 이미지는 다르거든. 말하자면 키아는 원리주의쪽일까. 나는 흑백합파고, 카란 씨는 사실 ‘그런 건 백합이 아냐!’라고 돌 맞기 딱 좋은 위험한 노선. 사도邪道? 아니, 마도魔道?”
자세히 캐묻기가 무섭다. 일단 최소한의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알겠어.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마워.”
재희와 키아가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웠다.
“나는 네가 사랑 해줘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거잖아?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 도리가 아닐까 싶어서.”
“……카란 씨, 기억만 날아간 게 아닌 것 같아.”
“실례입니다!”
재희의 말에 키아가 급히 반발했다. 딴전을 피우는 재희를 다그쳐 사과하게 하더니, 자신도 사과의 말을 해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맙다는 건 제가 해야 할 말입니다. 당신의 기억이 사라지게 된 건 제 탓이니까.”
대략 사흘 정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나와 키아는 ‘망각’의 이노센트와 싸웠다고 한다. 이노센트란 건 또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가 되어서 좀 복잡해졌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정령 같은 거라고 한다. 칼의 이노센트는 칼질을 잘한다거나 칼을 만든다거나 하는 일을 하고, 불의 이노센트는 아무튼 뭔가 불태운다고 한다.
그리고 망각의 이노센트는, 물론 무엇인가를 잊게 만든다.
격전 끝에 망각의 이노센트를 격파했다고 생각한 순간, 망각의 이노센트가 자폭공격을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공격에서 키아를 감쌌지만, 그 이후 정신을 잃어 계속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내 상태를 점검한 엘리야라는 소녀 마법사는, 내 육체는 멀쩡하지만 그 기억에는 심각한 손상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현실이 되어버린 것 같고.
“그러니까 당신의 기억상실은 제 탓입니다.”
“그럴 리가.”
나는 웃었다.
키아의 목소리는 무감정했지만 살짝 숙인 고개와 떨리는 손은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억이 없으면서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내가 원해서 널 감싼 거잖아? 그게 왜 네 탓이야? 게다가 너랑 내가 백합 관계였다는 말은 서로 좋아했다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을 감싸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키아의 얼굴에서 엄격함의 가면이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그녀가 안쓰러워서 끌어안았다. 몸이 닿는 순간 얼어붙은 그녀의 등을 작게 두드리며 달랬다.
“걱정마. 나는 계속 곁에 있을게. 항상 널 지켜줄게.”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 말을 해버렸다고 생각하는데 키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키아는 이런 말에 약한 걸까? 좀 더 부끄러운 말을 해볼까 생각하는데 재희가 살짝 가시가 있는 말을 뱉었다.
“그럼 카란 씨는 몸이 여러 개 필요하겠네.”
“응?”
“실은 카란 씨랑 백합이었던 건 키아만이 아니거든! 엘리야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던하르 씨도 있고. 아, 던하르 씨는 백합 아니다?”
응?
응응?
“어, 저기, 그 말대로라면 그건 마치 내가 바람, 아니 문어발을 뻗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응. 사실인걸.”
키아를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노, 농담 참 무섭네. 그런 농담을 정색하고 말하는 거 아냐.”
“그렇지만 사실이야? 키아에게 물어봐도 괜찮아.”
나는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키아를 바라보았다. 저 무뚝뚝한 말투의 소녀가 설마 저기 동조해서 거짓말을 하진 않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키아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재희는 거기에다 결정타까지 날렸다.
“사실 키스는 던하르 씨랑 했고.”
“나,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야…….”
기억상실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뒤늦게 깨달았다.
기세를 탄 재희는 쉬지 않고 기억 상실 이전의 내가 얼마나 나쁜 녀석이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키아 만나서 한 말은 아마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였지?”
“……어, 어딘가 다른 나라말로 ‘안녕하세요’라는 의미가 아닐까?”
희망을 말해봤지만 아무래도 다른 우주의 말이 아니면 그런 착각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다음엔 실제로 만지려고 하다가 키아에게 죽도록 맞았어.”
“맞아도 싸…….”
“그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어.”
“왜 그 끈기를 좋은 방향으로 쓰지 않았던 거야!”
“너무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중엔 맞으면서 느끼는 체질이 되고 말았어.”
“거, 거짓말……?!”
키아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키아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변명해줄 구석이 없는 것임을 이해했다.
“한 번은 거대한 촉수괴물이 되어서 우리를 덮친 적도 있었어.”
“이건 1200% 거짓말이야!”
“……이, 있었습니다, 그런 적도.”
“키아가 샤워하는데 일부러 들어간 적도 있었어. 키아 알몸인 거 뻔히 알면서도 계속 있었고.”
“범죄잖아! 이미 몇 번이나 범죄였던 것 같지만! 아니, 여자끼리니까 괜찮……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나 키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끔찍해하는 것 같다. 맙소사. 여자끼리라도 범죄는 범죄다.
“애초에 우리들이 사는 기숙사에 무단 침입했지?”
“그, 그거라면 저희들이 불렀다고 해야 맞지 않습니까.”
키아가 간신히 변명해주었다. 하지만.
“사실 충격받을 것 같아서 말 안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카란 씨, 사실은 남자야.”
“뭐?!!!”
“그래. 못 믿겠지? 그 얼굴, 부드러운 살결, 애교 있는 동작, 어딜 봐도 뛰어난 미소녀인 카란 씨. 하지만 남자야.”
나는 당황해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환자복에 가까운 풍성한 파자마. 성별을 특정할 복장은 아니다. 기억을 잃었어도 자기 몸은 자기 몸이니까 새삼스럽게 뭐가 달렸는지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얼굴만 보고 여자라고 생각했다…….
재희가 최후의 공격을 날렸다.
“첫 키스는 남자인 던하르 씨랑 했던 카란 씨. 하지만 남자야.”
“나는 대체 뭐하는 녀석인 거야!!!”
3.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나는 내 것이었다는 휴대전화를 받아 그 통화, 문자내역을 확인했다. 난감하게도 사용내역이 극히 적고 방금 들은 것들을 확정 지을만한 내용은 없다.
사진함을 뒤져보자 어째서인지 치파오를 입고 찍은 사진이라든가, 여자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라든가, 여자 수영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라든가 밖에 없었다.
“아, 아니, 잠깐……. 다른 건 몰라도 수영복은 어떻게……. 물리적으로 무리수가…….”
“그걸 저희에게 물어도 곤란합니다만…….”
“‘몇 백 년 간 해온 여장이다. 들킬 리가 없지!’라고 거만하게 말했어.”
난 여장을 몇 백 년 동안이나 해 온 건가. 대체 어째서.
아니아니,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푸념을 해도 소용없다. 이렇게 되면 직접 캐묻는 수 밖에 없겠지.
나는 전화번호부에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죄송합니다만, 저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써서.
엘리야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제가 한 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사건을 일으키는 골칫덩어리. 부탁이니 돌아갈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세요, 오라버님.] - 어쩐지 무섭다.
류시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주위의 아가씨들 모두를 꼬드기고 있으면서 제게는 이상하게 거리를 두는 분이죠. 교복 페티시가 아닐까 걱정되네요.] - 교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던하르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어~~~~~] - 엘리야의 답장보다 더 무서웠다.
Kill You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하렘이라는 태양을 향해 배덕의 날갯짓을 하는 청초한 이카로스. 가시덤불에 떨어져 그 날개가 붉게 물들어도 계속 날아올라주세요! 대기권돌파요망! 그리고 스승님을 잘 부탁해요!] - 총체적으로 해독불능.
“재, 재희 너는?”
“음. 귀여워. 촉이 좋달까, 민감해서 찌르는 맛이 있어. 반응도 재밌고. 멋있을 때도 가끔은 있고. 배려심도 있고 눈치도 있으니까 두 번째 첩으로 두면 딱 좋겠네!”
눈물이 난다.
“그럼 이제 키아도 말해줘야지?”
재희는 웃으며 키아에게로 바톤을 넘겼다. 나도 마지막 희망을 품고 키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키아는 한참을 주저했지만 나와 재희가 발하는 ‘대답해라 대답해’ 광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저는…….”
-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어라?
의아해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연지 씨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가, 갑자기 무슨 말인가요, 하란 양? 의미를 잘 모르겠는데, 혹시 사회적인 입장에서의 자신에 대한 질문인가요 아니면 제가 개인적으로 하란양]
연지 씨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2.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연지 씨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3.
[시, 실수로 전송버튼을 눌러버렸어요. 미안해요. 놀라진 않았죠? 저는 하란 양의 학업이나 평소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른스럽고 상냥한]
연지 씨라는 인물이…… 그냥 이어서 쓰자.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어요. 성실하고 배려심이 있을 것 같아요. 앗, 혹시 그런 건가요?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거기 대해서 화가 났다든가? 그렇죠?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죠? 사실은 어른스럽게 있는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고 이리저리 스트레스도 쌓이지만 그걸 내색하지 않는 건데, 실은 선생님도 나이는 들었지만 전혀 어른스럽지 못하거든요. 어른스럽다는 게 사실은 절대 쉽게 얻을 수 있는 평가가 아닌데……. 만약 그런 걸로 고민 중이라면 안 하던 일을 해 보는 게 좋아요. 주위 사람들의 평가가 자신의 천성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자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위험하거나 나쁜 일은 안 되지만, 그런 변화를 주는 걸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시 정의될 수도 있거든요.]
“연지 씨라는 분은 선생님이야?”
“응. 선생님이 보내셨어?”
“응……. 엄청난 교육자 정신이 느껴지네.”
하란 양이란 건 누구냐는 의문이 생겼지만 입에는 담지 않기로 했다. 이 이상 문제를 늘리고 싶지 않다.
-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어라라?
다시 한 번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메시지함을 확인했다.
[마, 만약에,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라면……, 앞에서 말한 것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저는 하란 양의 그런 모습이 참 좋]
[좋아요.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아니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니까 어쩐지 더 이상하게 된 것 같은데]
[미안해요. 갑자기 문자메시지를 받아서 조금 당황했나 봐요. 너무 길어졌으니까 답장 보내달라고는 안 할게요. 응원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세요]
얼마나 강하게 응원하고 계시는 거예요, 연지 씨…….
어질어질한 정신을 추스르고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뗐다.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서 휴대전화의 내용을 훔쳐보던 키아와 재희가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은 여전히 머릿속이 꽃밭이네……. 카란 씨는 이런데.”
재희의 목소리에 나를 규탄하려는 기색은 섞여있지 않았지만 어딘가 김이 빠진 듯 했다. 키아가 약하게 동의했다.
“그, 그렇습니다. 좀 곤란합니다…….”
“아무래도 좀 과격한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아. 키아는 잠깐 나 좀 봐. 카란 씨는 좀 기다리고 있고.”
재희는 키아를 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침대에 몸을 던져 드러누운 다음 지금까지 들은 정보를 정리해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타인의 애정을 먹고 사는 존재로, 여장을 귀신같이 해내고, 하렘을 꿈꾸고 있으며, 키스는 남자랑 했고, 그 남자에겐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는 얘기를 듣고, 누군가는 둘째 첩으로 삼고 싶다고 하고, 기타기타 등등등등.
죽을까.
점차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가 너무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한참 후에 키아가 다시 방 안에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재희는 따라 들어오지 않고, ‘파이팅!’이라는 말만 남기곤 문을 닫았다.
키아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쭈뼛거리며 침대까지 다가와서는, 어째서인지 내 발끝만 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재희랑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다, 당신의 기억상실을 낫게 할 방법에 대해서 대화를 했습니다.”
“방법이 있어?”
키아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좀 더 기다렸다. 계속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키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방법들은 효과가 의심됩니다. 차라리 엘리야 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오라버님이라고 불렀던 그 소녀는 그리스에 가서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를 찾고 있다고 한다. 스케일이 너무 커져서 아찔해지려는 찰나, 정확히는 므네모시네를 섬기는 약초사의 전승을 찾는 것이라는 정정이 들어왔다.
현실감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쪽은 100여 년 전에 엘리야가 직접 만난 적이 있는 마법학파라고 한다. 적어도 100년 전에는 있었던 게 확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얘기를 들어도 안심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0년 지나서 어떻게 찾아낸다는 걸까.
“차라리 다른 방법이 낫지 않을까. 효과가 좀 의심되더라도 저렇게 시간 오래 걸리는 건 아닐 거 아냐. 설마 비슷해?”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해보자.”
키아는 내가 말한 이후에도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슬리퍼를 벗고 침대 위에 올라와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서로가 내뱉는 호흡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어? 무슨 방법인데 이렇게까지 밀착하는 거야.”
“미안해요, 카란. 용서하세요.”
괜히 나까지 긴장된다고 말하려던 그 순간, 키아가 내 허리에 한 팔을 감았다. 그리고……,
초근접 거리에서 맹렬한 보디블로를 먹였다.
본래대로라면 날 벽까지 날려버리고도 남을 위력이었지만 허리에 감긴 키아의 팔이 그걸 막았다. 다시 말해 충격은 어딘가 분산되거나 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복부에 전달되었다는 소리다.
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키아가 당황해하며 날 붙잡고 등을 문질러주었다. 그 손길에 후회로 가득하다는 것만은 그 정신없는 도중에도 알 수 있었지만, 대체 왜……!
숨소리도 못 내고 꺽꺽거리던 것이 간신히 나아졌을 때, 나는 키아에게 항의했다.
“뭐, 뭐하는 거야……. 왜 날 암살하려고…….”
“미,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기억은 역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있던 기억도 날아가겠다! 대체 왜 보디블로로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거야!”
“재희가 기억상실에는 강한 충격을 주거나 익숙한 일상을 체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이 방법이면 둘 다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한 충격은 알겠어. 그런데 일상이라고? 이렇게 맞고 지내는 게 일상이라고?!”
분명히 그런 이야기도 했지만…….
“아, 아무래도 좋아! 하다못해 경고라도 해줄 수 있지 않았냐고!”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말해버리면 충격이 덜해져서 효과가 없을 거라고…….”
“각오한다고 충격이 줄어들 수준이 아니거든.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거든…….”
뼈와 살, 아니 영혼까지 분리된다고 밖에는 형용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쩔쩔매는 키아가 너무 보기 안쓰러웠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 문제를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으으,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안 위험한 걸로…….”
키아는 틀림없이 ‘다른 방법들은 효과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방법들. 복수형이다.
내가 그 말을 꺼내자 키아는 아까보다 더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거구나? 위험한 거야?”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프긴 하지만 후유증은 남지 않으니까 위험하지 않다…… 같은 건 아니지?”
“그것도 아닙니다. 아닙니다만…….”
키아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힘겹게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어딘가 비장감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라서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대체 무슨 방법인데 그래?”
키아는 대답하지 않고 세 번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행동에 들어갔다.
키아는 지금 하얀 블라우스 위에 조끼를 입고, 교칙대로 길이를 맞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춘추복에 해당하는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그 조끼를 벗어서 침대 한 쪽에 내려놓았다.
의아해하는 내 앞에서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옷깃 사이로 브래지어가 보이기 시작했고, 셋, 가슴의 트임이 넓어져 앙가슴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네……개째를 풀려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주저주저하던 키아는 결국 손을 내려놓고 나를 향해, 하지만 시선을 똑바로 맞추지 못한 채 말했다.
“아, 아까는 갑자기 때려서 미안했습니다. 그 대신…… 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이게 두 번째 방법입니다.”
키아는 그 후에도 무엇인가 말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져서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가슴을 만져주세요.
4.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키아의 가슴은 예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그러나 완벽한, 만약 종교인이라면 법열法悅을 느끼고 말 것만 같은, 종교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지극히 당연할, 본래 지상에 있어서는 안 될,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첫 대면에 가슴 만지게 해달라고 앙앙거렸던 이유가 납득이 갈 정도의, 오직 Divine이라는 말로만 형용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성스러운 가슴이었다.
음, 틀림없어. 키아의 제안에 따른다면 나는 정말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거다.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올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사실 기억이 날아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강한 충격이겠지.
“이렇게 매력적인 유혹은 처음 듣지만……, 미안. 거절할게.”
키아가 당황한 얼굴이 된다. 그 표정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푹 찔러봤다.
“공주병.”
키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홱 하고 이불을 끌어당겨 뒤집어썼다. 그대로 침대를 나와 도망치려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쓰러졌다. 부끄러움이 제곱이 되었는지 제대로 일어나지도, 이불을 벗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이불 끝자락을 붙잡아서 도망치려는 키아를 막았다.
“저기 말야, 알고 싶은 게 있어.”
이불 속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 말야,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까 아직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을 안 했어. 그야 태도를 보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지만.”
어느 정도만 알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넘쳐날 정도로 알 수 있다.
“그래도 역시 가슴을 만져달라거나 하는 말을 꺼내기는 부끄러운 거잖아. 지금도 굉장히 부끄러운 것 같고. 나는 네가 그런 부끄러움까지 감수하면서 기억을 되살려 주고 싶을 정도의 사람이었어?”
아주 작은 소리가 이불 밑으로 힘겹게 기어 나왔다.
“……네.”
“정말? 기억이 없는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나라는 녀석 너무 엉망진창이잖아. 일단 성추행은 확실한 것 같고,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인정하긴 싫지만 남자관계……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취미도 이상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녀석을 좋아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걸.”
“그,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점을 말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런 걸 말하는 건 부끄러우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런 장점이 있으니까 이런 단점을 받아들여 달라는 건 양심 없는 짓 아닐까.”
키아가 조금 멈칫하더니, 계속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벗었다. 방금까지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정한 모습. 이건 그녀의 천성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씀하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기억 같은 거 되찾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해서. 기억상실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전의 나를 이해할 수가 없거든. 바르게 살았다곤 생각할 수 없고, 그 기억을 찾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
키아는 아연해하는 기색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좋지 않은 방법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 씨가 안전한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그게 아냐. 위험하건 아니건 내키지 않는다니까.”
차라리 지금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일시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지금의 나는 기억상실 이전과는 다른 것 같다. 키아를 끌어안았을 때도 두근거림은 있었지만 두 사람이 말했던 것 같은 트러블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더 침착한 것 같고, 무엇보다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있다.
차라리 지금의 내가 더 낫지 않을까? 더 좋은 녀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안심시키려고 하는 건 아닙니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자신의 문제만 걱정하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과거의 기억이라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야. 너희들에게 들은 얘기를 총합한 다음, 거기에서 아무리 긍정적인 상을 끌어내봤자, 곁에 있는 사람 울리는 것밖에 상상되지 않아. 그런 기억은 없는 게 나아.”
차라리 지나간 일은 모두 흘려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럼 적어도 분수에도 맞지 않는 꿈을 꾸어서 생기는 실수는…….
키아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누굽니까?”
“응?”
“죄송하지만 전 당신 같은 사람 모릅니다.”
“자, 잠깐만?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미안. 사과할게. 그야 너와 관련된 기억도 있는데 그걸 없는 게 낫다고 말했으니까 화가 낫겠지만…….”
키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했다.
“엘리야 씨는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망각이란 후회의 산물, 또는 후회가 주는 선물이라고. 자폭이라는 형태로 이노센트의 일부를 뒤집어 쓴 이상,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억 상실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자기 자신을 후회하고,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는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요.”
“잠깐만. 그건 뭔가 너무 한 것 같은데……. 잊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 기억상실 상태야. 그렇게 막 ‘나의 카란은 이렇지 않아!’하고 억지로 밀어붙이면 솔직히 좀…….”
자신이 하는 말이 변명이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닫았다. 키아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기억을 잃어도, 어떤 일을 겪어도, 당신이 결코 하지 않을 말을 했으니까요.”
무슨 말이었을까.
뭐가 잘못되어서 그녀는 내가 ‘카란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걸까.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기억의 유무가 아니다. 기억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문제다. 카란에게 있어서 그건 본능일 거라고 키아는 말했다. 본래는 기억의 영역에 있어야 할 맹세를, 본능에 다시 썼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거창한 짓을 할 수 있었다는 것보다, 그런 사람이 틀림없다고 확신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더욱 큰 질투를 느꼈다.
나는 백기를 들었다.
“맞췄습니다. 아쉽게도 전 카란이 아니라 그 몸에 달라붙은 망각의 이노센트 한 토막이랍니다. 마침 이렇게 된 김에 이놈에게 빌붙어서 살아가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젠장!”
덧붙이자면 각성 계기는 그 보디블로였다. 자폭 직전에 키아에게 얻어맞은 일격의 아픔이 되살아났거든. 쳇쳇. 너무 빨리 들통나버려서 분하다.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깽판 쳐주겠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안 될 것 같네. 이 녀석, 허약한 주제에 정신 내성만은 쓸데없이 단단해……. 역으로 침식당하고 있어…….”
“……네. 정말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키아는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딱딱한 표정일 때도 미인이지만 긴장감이 풀어진 지금은 더 예뻤다.
아, 진짜 뭐야. 조금만 더 잘 속였으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금방 자기를 인정받으려다 지뢰를 밟아버렸다. 망각은 후회의 산물이라더니 사실인가보다. 나 지금 맹렬하게 후회중이야.
……뭐, 저 정도 웃는 얼굴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할까.
“자, 그럼 그 새파란 불로 샤워 좀 부탁해. 그럼 나도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 녀석에게 침식당하는 기분이야.”
카란의 몸에서 빠져나와 키아의 곁을 맴돌았다. 아,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키아가 가슴 만져보라고 할 때 응할 걸! 그렇지만 그랬다간 카란 녀석이 잽싸게 완전부활 할 것 같았단 말야! 젠장! 젠장젠장젠장! 미안합니다! 실은 나도 똑같은 놈이었나봐요! 침식 탓일 텐데!
키아의 손에서 푸른 불길이 피어올랐다. 성창염이라고 부르는, 인류를 사악에서 수호한다는 신비한 힘을 가진 불길이다. 묘하게 따뜻한 그 불길을 뒤집어쓰고 있자니, 지상에 와서 인간의 상념들에게 침범 받았던 몸이 씻기기 시작했다.
- 자, 잠깐! 그러고 보니까……!!!
생각해보면 키아가 카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대답을 듣지 못했다. 뒤늦게 외쳐봤지만 그 때는 이미 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상태였다.
하지만 뭐, 짐작은 갔다.
내가 빠져나온 이후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카란을 조심스럽게 받아드는 키아의 표정을 보면 모를 수가 없지.
5.
카란은 몇 시간 후에 눈을 떴다.
침대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키아가 다급히 달려들어 이상한 사실을 물었다.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제 이름은 기억납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납니까? 던하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듭니까.
카란. 키아. 망각의 이노센트랑 싸우다가 그 녀석이 자폭하는데 네가 내 앞을 감싸려고 해서 내가 네 앞을 가로막았어. 생각해보니까 바보짓이었던 것 같아. 던하르? 던하르? 으아아아아아아악! 어째서 잠에서 깨자마자 그 놈 이름이 나오는 건데?!
키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카란이 반발했다. 대체 뭐가 다행인데!
키아가 기다리다 잠든 재희를 깨우러 가려는데 카란이 문득 질문했다. 그런데 말야. 나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아. 네가 옷을 풀어헤치고 가슴을 만져달라고 유혹하는…….
그러나 카란이 그 꿈의 내용을 다시 돌이키는 일은 없었다.
카란은 그 다음 순간 번개처럼 달려든 키아에게 폭풍 같은 보디블로 3연타를 맞고 이 시기의 일을 산뜻하게 잊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났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는,
만우절 거짓말 한 토막입니다.
1.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침구는 하나같이 새것이었고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몸을 일으켜서 주위를 확인해보자 고급스러운 건 침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방 안에 놓인 가구들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모두 간직한 초 고급품이었다.
“무슨 왕궁에라도 와 있는 걸까.”
자기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어쩐지 멀게 느껴져서 조금 갸웃했다. 신기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온 것 같은데. 잠에서 덜 깨서 메마른 목소리가 나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방 한 쪽엔 고풍스러운 가구들 사이에서도 튀지 않게 배치된 소형 냉장고가 있었다. 엉거주춤 침대에서 나와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을 한 통 꺼냈다.
꼴깍꼴깍꼴깍. 원샷.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흐르면서 몸이 으스스 떨렸다. 이 서늘함이 멍한 머리를 낫게 해주길 기대했지만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았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방 안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방에는 문이 둘 있었다. 창가 반대쪽에 있는 커다란 문과 벽 구석에 설치된 작은 문.
작은 문을 열자 그 안은 개인 욕실이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수온을 조절한 다음 세안을 했다. 타월로 물기를 닦아내고 세면대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 비친 것은 파란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눈에는 묘한 장난기가 어려 있다. 애교가 많다고 해야 할까, 표정이 다양할 것 같은 얼굴이다.
생긋 웃으며 말해봤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대답해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밖으로 나가야겠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질문해야겠다.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아니, 철학적인 담론을 하자는 게 아니라, 내 이름이라든가 주소지라든가…….
큰 문이 벌컥 열렸다.
두 명의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소녀는 1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풍성하게 웨이브진 머리카락과 부드럽고 통통해 보이는 뺨이 매력적인 소녀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이쪽의 기분까지 기쁘게 만든다. 지금은 어쩐지 조금 가라앉은 표정이었지만.
다른 소녀는 대조적으로 훤칠한 키였다. 170cm를 넘을지도 모르겠다. 훤칠한 키나 진지하고 엄격한 시선과 달리 아직 어린 티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얼굴. 머리카락에는 살짝 붉은 빛이 감돌았다.
작은 소녀가 내쪽을 향해 물었다.
“카란 씨? 괜찮아? 기억 멀쩡해?”
적어도 자신이 누군지를 찾아 끝없는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 아무 것도 기억 안 나.”
큰 소녀가 무척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2.
작은 소녀의 이름은 재희라고 했고, 큰 소녀의 이름은 키아라고 했다. 믿을 수 없지만 둘은 동갑이었다. 재희 쪽이 동안……이라기보다는 상당히 미성숙한 느낌이었지만.
재희와 키아는 번갈아가며 나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름은 카란. 인간은 아니고 바이스Vice라는 이상한 종족. 자신을 향한 타인의 애정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 두 소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잠깐만, 나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키아가 답했다. 여고생답지 않게 딱딱한 말투가 그녀의 습관인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 누군가가 내게 애정을 줘야 하는 거잖아?”
“어떻게 살다니? 그야 우리들이…….”
“같은 여자끼리라도 상관없는 거야? 살아가는데 중요한 문제니까 확인을 해 둬야 하잖아.”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재희가 갑자기 환한 미소를 띄웠다.
“응. 당연하잖아. 애정에 남녀노소가 어딨어? 카란 씨랑 키아, 백합이었어!”
“무, 무슨 소리를……!”
키아가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냈다.
“쉿! 카란 씨가 혼란스러워하잖아. 기억상실이라 어지러울 텐데 더 헷갈리게 해야 해?”
키아는 그 말에 잠깐 나를 바라보고, 안절부절 못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나를 보고, 결국 고개를 숙인 채 ‘네’라고 말했다.
“내 눈앞에서 당당하게 사기극이 펼쳐지는 것 같은데.”
내가 찌르자 재희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백합이라는 건 여성끼리의 러브리한 관계를 말하는 거거든. 속어, 가 아니라 은어구나 은어! 키아는 그런 거 좀 부끄러워해.”
“그래? 예쁜 말인 것 같은데. 어쩐지 청초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들고.”
“더 자세히 파고들면 좀 많이 복잡하지만, 아무튼 사람마다 백합에 대한 이미지는 다르거든. 말하자면 키아는 원리주의쪽일까. 나는 흑백합파고, 카란 씨는 사실 ‘그런 건 백합이 아냐!’라고 돌 맞기 딱 좋은 위험한 노선. 사도邪道? 아니, 마도魔道?”
자세히 캐묻기가 무섭다. 일단 최소한의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알겠어.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마워.”
재희와 키아가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웠다.
“나는 네가 사랑 해줘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거잖아?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 도리가 아닐까 싶어서.”
“……카란 씨, 기억만 날아간 게 아닌 것 같아.”
“실례입니다!”
재희의 말에 키아가 급히 반발했다. 딴전을 피우는 재희를 다그쳐 사과하게 하더니, 자신도 사과의 말을 해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맙다는 건 제가 해야 할 말입니다. 당신의 기억이 사라지게 된 건 제 탓이니까.”
대략 사흘 정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나와 키아는 ‘망각’의 이노센트와 싸웠다고 한다. 이노센트란 건 또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가 되어서 좀 복잡해졌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정령 같은 거라고 한다. 칼의 이노센트는 칼질을 잘한다거나 칼을 만든다거나 하는 일을 하고, 불의 이노센트는 아무튼 뭔가 불태운다고 한다.
그리고 망각의 이노센트는, 물론 무엇인가를 잊게 만든다.
격전 끝에 망각의 이노센트를 격파했다고 생각한 순간, 망각의 이노센트가 자폭공격을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공격에서 키아를 감쌌지만, 그 이후 정신을 잃어 계속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내 상태를 점검한 엘리야라는 소녀 마법사는, 내 육체는 멀쩡하지만 그 기억에는 심각한 손상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현실이 되어버린 것 같고.
“그러니까 당신의 기억상실은 제 탓입니다.”
“그럴 리가.”
나는 웃었다.
키아의 목소리는 무감정했지만 살짝 숙인 고개와 떨리는 손은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억이 없으면서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내가 원해서 널 감싼 거잖아? 그게 왜 네 탓이야? 게다가 너랑 내가 백합 관계였다는 말은 서로 좋아했다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을 감싸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키아의 얼굴에서 엄격함의 가면이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그녀가 안쓰러워서 끌어안았다. 몸이 닿는 순간 얼어붙은 그녀의 등을 작게 두드리며 달랬다.
“걱정마. 나는 계속 곁에 있을게. 항상 널 지켜줄게.”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 말을 해버렸다고 생각하는데 키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키아는 이런 말에 약한 걸까? 좀 더 부끄러운 말을 해볼까 생각하는데 재희가 살짝 가시가 있는 말을 뱉었다.
“그럼 카란 씨는 몸이 여러 개 필요하겠네.”
“응?”
“실은 카란 씨랑 백합이었던 건 키아만이 아니거든! 엘리야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던하르 씨도 있고. 아, 던하르 씨는 백합 아니다?”
응?
응응?
“어, 저기, 그 말대로라면 그건 마치 내가 바람, 아니 문어발을 뻗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응. 사실인걸.”
키아를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노, 농담 참 무섭네. 그런 농담을 정색하고 말하는 거 아냐.”
“그렇지만 사실이야? 키아에게 물어봐도 괜찮아.”
나는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키아를 바라보았다. 저 무뚝뚝한 말투의 소녀가 설마 저기 동조해서 거짓말을 하진 않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키아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재희는 거기에다 결정타까지 날렸다.
“사실 키스는 던하르 씨랑 했고.”
“나,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야…….”
기억상실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뒤늦게 깨달았다.
기세를 탄 재희는 쉬지 않고 기억 상실 이전의 내가 얼마나 나쁜 녀석이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키아 만나서 한 말은 아마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였지?”
“……어, 어딘가 다른 나라말로 ‘안녕하세요’라는 의미가 아닐까?”
희망을 말해봤지만 아무래도 다른 우주의 말이 아니면 그런 착각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다음엔 실제로 만지려고 하다가 키아에게 죽도록 맞았어.”
“맞아도 싸…….”
“그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어.”
“왜 그 끈기를 좋은 방향으로 쓰지 않았던 거야!”
“너무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중엔 맞으면서 느끼는 체질이 되고 말았어.”
“거, 거짓말……?!”
키아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키아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변명해줄 구석이 없는 것임을 이해했다.
“한 번은 거대한 촉수괴물이 되어서 우리를 덮친 적도 있었어.”
“이건 1200% 거짓말이야!”
“……이, 있었습니다, 그런 적도.”
“키아가 샤워하는데 일부러 들어간 적도 있었어. 키아 알몸인 거 뻔히 알면서도 계속 있었고.”
“범죄잖아! 이미 몇 번이나 범죄였던 것 같지만! 아니, 여자끼리니까 괜찮……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나 키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끔찍해하는 것 같다. 맙소사. 여자끼리라도 범죄는 범죄다.
“애초에 우리들이 사는 기숙사에 무단 침입했지?”
“그, 그거라면 저희들이 불렀다고 해야 맞지 않습니까.”
키아가 간신히 변명해주었다. 하지만.
“사실 충격받을 것 같아서 말 안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카란 씨, 사실은 남자야.”
“뭐?!!!”
“그래. 못 믿겠지? 그 얼굴, 부드러운 살결, 애교 있는 동작, 어딜 봐도 뛰어난 미소녀인 카란 씨. 하지만 남자야.”
나는 당황해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환자복에 가까운 풍성한 파자마. 성별을 특정할 복장은 아니다. 기억을 잃었어도 자기 몸은 자기 몸이니까 새삼스럽게 뭐가 달렸는지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얼굴만 보고 여자라고 생각했다…….
재희가 최후의 공격을 날렸다.
“첫 키스는 남자인 던하르 씨랑 했던 카란 씨. 하지만 남자야.”
“나는 대체 뭐하는 녀석인 거야!!!”
3.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나는 내 것이었다는 휴대전화를 받아 그 통화, 문자내역을 확인했다. 난감하게도 사용내역이 극히 적고 방금 들은 것들을 확정 지을만한 내용은 없다.
사진함을 뒤져보자 어째서인지 치파오를 입고 찍은 사진이라든가, 여자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라든가, 여자 수영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라든가 밖에 없었다.
“아, 아니, 잠깐……. 다른 건 몰라도 수영복은 어떻게……. 물리적으로 무리수가…….”
“그걸 저희에게 물어도 곤란합니다만…….”
“‘몇 백 년 간 해온 여장이다. 들킬 리가 없지!’라고 거만하게 말했어.”
난 여장을 몇 백 년 동안이나 해 온 건가. 대체 어째서.
아니아니,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푸념을 해도 소용없다. 이렇게 되면 직접 캐묻는 수 밖에 없겠지.
나는 전화번호부에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죄송합니다만, 저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써서.
엘리야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제가 한 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사건을 일으키는 골칫덩어리. 부탁이니 돌아갈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세요, 오라버님.] - 어쩐지 무섭다.
류시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주위의 아가씨들 모두를 꼬드기고 있으면서 제게는 이상하게 거리를 두는 분이죠. 교복 페티시가 아닐까 걱정되네요.] - 교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던하르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어~~~~~] - 엘리야의 답장보다 더 무서웠다.
Kill You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하렘이라는 태양을 향해 배덕의 날갯짓을 하는 청초한 이카로스. 가시덤불에 떨어져 그 날개가 붉게 물들어도 계속 날아올라주세요! 대기권돌파요망! 그리고 스승님을 잘 부탁해요!] - 총체적으로 해독불능.
“재, 재희 너는?”
“음. 귀여워. 촉이 좋달까, 민감해서 찌르는 맛이 있어. 반응도 재밌고. 멋있을 때도 가끔은 있고. 배려심도 있고 눈치도 있으니까 두 번째 첩으로 두면 딱 좋겠네!”
눈물이 난다.
“그럼 이제 키아도 말해줘야지?”
재희는 웃으며 키아에게로 바톤을 넘겼다. 나도 마지막 희망을 품고 키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키아는 한참을 주저했지만 나와 재희가 발하는 ‘대답해라 대답해’ 광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저는…….”
-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어라?
의아해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연지 씨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가, 갑자기 무슨 말인가요, 하란 양? 의미를 잘 모르겠는데, 혹시 사회적인 입장에서의 자신에 대한 질문인가요 아니면 제가 개인적으로 하란양]
연지 씨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2.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연지 씨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3.
[시, 실수로 전송버튼을 눌러버렸어요. 미안해요. 놀라진 않았죠? 저는 하란 양의 학업이나 평소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른스럽고 상냥한]
연지 씨라는 인물이…… 그냥 이어서 쓰자.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어요. 성실하고 배려심이 있을 것 같아요. 앗, 혹시 그런 건가요?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거기 대해서 화가 났다든가? 그렇죠?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죠? 사실은 어른스럽게 있는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고 이리저리 스트레스도 쌓이지만 그걸 내색하지 않는 건데, 실은 선생님도 나이는 들었지만 전혀 어른스럽지 못하거든요. 어른스럽다는 게 사실은 절대 쉽게 얻을 수 있는 평가가 아닌데……. 만약 그런 걸로 고민 중이라면 안 하던 일을 해 보는 게 좋아요. 주위 사람들의 평가가 자신의 천성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자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위험하거나 나쁜 일은 안 되지만, 그런 변화를 주는 걸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시 정의될 수도 있거든요.]
“연지 씨라는 분은 선생님이야?”
“응. 선생님이 보내셨어?”
“응……. 엄청난 교육자 정신이 느껴지네.”
하란 양이란 건 누구냐는 의문이 생겼지만 입에는 담지 않기로 했다. 이 이상 문제를 늘리고 싶지 않다.
-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어라라?
다시 한 번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메시지함을 확인했다.
[마, 만약에,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라면……, 앞에서 말한 것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저는 하란 양의 그런 모습이 참 좋]
[좋아요.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아니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니까 어쩐지 더 이상하게 된 것 같은데]
[미안해요. 갑자기 문자메시지를 받아서 조금 당황했나 봐요. 너무 길어졌으니까 답장 보내달라고는 안 할게요. 응원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세요]
얼마나 강하게 응원하고 계시는 거예요, 연지 씨…….
어질어질한 정신을 추스르고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뗐다.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서 휴대전화의 내용을 훔쳐보던 키아와 재희가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은 여전히 머릿속이 꽃밭이네……. 카란 씨는 이런데.”
재희의 목소리에 나를 규탄하려는 기색은 섞여있지 않았지만 어딘가 김이 빠진 듯 했다. 키아가 약하게 동의했다.
“그, 그렇습니다. 좀 곤란합니다…….”
“아무래도 좀 과격한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아. 키아는 잠깐 나 좀 봐. 카란 씨는 좀 기다리고 있고.”
재희는 키아를 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침대에 몸을 던져 드러누운 다음 지금까지 들은 정보를 정리해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타인의 애정을 먹고 사는 존재로, 여장을 귀신같이 해내고, 하렘을 꿈꾸고 있으며, 키스는 남자랑 했고, 그 남자에겐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는 얘기를 듣고, 누군가는 둘째 첩으로 삼고 싶다고 하고, 기타기타 등등등등.
죽을까.
점차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가 너무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한참 후에 키아가 다시 방 안에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재희는 따라 들어오지 않고, ‘파이팅!’이라는 말만 남기곤 문을 닫았다.
키아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쭈뼛거리며 침대까지 다가와서는, 어째서인지 내 발끝만 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재희랑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다, 당신의 기억상실을 낫게 할 방법에 대해서 대화를 했습니다.”
“방법이 있어?”
키아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좀 더 기다렸다. 계속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키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방법들은 효과가 의심됩니다. 차라리 엘리야 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오라버님이라고 불렀던 그 소녀는 그리스에 가서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를 찾고 있다고 한다. 스케일이 너무 커져서 아찔해지려는 찰나, 정확히는 므네모시네를 섬기는 약초사의 전승을 찾는 것이라는 정정이 들어왔다.
현실감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쪽은 100여 년 전에 엘리야가 직접 만난 적이 있는 마법학파라고 한다. 적어도 100년 전에는 있었던 게 확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얘기를 들어도 안심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0년 지나서 어떻게 찾아낸다는 걸까.
“차라리 다른 방법이 낫지 않을까. 효과가 좀 의심되더라도 저렇게 시간 오래 걸리는 건 아닐 거 아냐. 설마 비슷해?”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해보자.”
키아는 내가 말한 이후에도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슬리퍼를 벗고 침대 위에 올라와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서로가 내뱉는 호흡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어? 무슨 방법인데 이렇게까지 밀착하는 거야.”
“미안해요, 카란. 용서하세요.”
괜히 나까지 긴장된다고 말하려던 그 순간, 키아가 내 허리에 한 팔을 감았다. 그리고……,
초근접 거리에서 맹렬한 보디블로를 먹였다.
본래대로라면 날 벽까지 날려버리고도 남을 위력이었지만 허리에 감긴 키아의 팔이 그걸 막았다. 다시 말해 충격은 어딘가 분산되거나 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복부에 전달되었다는 소리다.
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키아가 당황해하며 날 붙잡고 등을 문질러주었다. 그 손길에 후회로 가득하다는 것만은 그 정신없는 도중에도 알 수 있었지만, 대체 왜……!
숨소리도 못 내고 꺽꺽거리던 것이 간신히 나아졌을 때, 나는 키아에게 항의했다.
“뭐, 뭐하는 거야……. 왜 날 암살하려고…….”
“미,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기억은 역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있던 기억도 날아가겠다! 대체 왜 보디블로로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거야!”
“재희가 기억상실에는 강한 충격을 주거나 익숙한 일상을 체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이 방법이면 둘 다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한 충격은 알겠어. 그런데 일상이라고? 이렇게 맞고 지내는 게 일상이라고?!”
분명히 그런 이야기도 했지만…….
“아, 아무래도 좋아! 하다못해 경고라도 해줄 수 있지 않았냐고!”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말해버리면 충격이 덜해져서 효과가 없을 거라고…….”
“각오한다고 충격이 줄어들 수준이 아니거든.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거든…….”
뼈와 살, 아니 영혼까지 분리된다고 밖에는 형용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쩔쩔매는 키아가 너무 보기 안쓰러웠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 문제를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으으,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안 위험한 걸로…….”
키아는 틀림없이 ‘다른 방법들은 효과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방법들. 복수형이다.
내가 그 말을 꺼내자 키아는 아까보다 더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거구나? 위험한 거야?”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프긴 하지만 후유증은 남지 않으니까 위험하지 않다…… 같은 건 아니지?”
“그것도 아닙니다. 아닙니다만…….”
키아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힘겹게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어딘가 비장감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라서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대체 무슨 방법인데 그래?”
키아는 대답하지 않고 세 번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행동에 들어갔다.
키아는 지금 하얀 블라우스 위에 조끼를 입고, 교칙대로 길이를 맞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춘추복에 해당하는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그 조끼를 벗어서 침대 한 쪽에 내려놓았다.
의아해하는 내 앞에서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옷깃 사이로 브래지어가 보이기 시작했고, 셋, 가슴의 트임이 넓어져 앙가슴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네……개째를 풀려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주저주저하던 키아는 결국 손을 내려놓고 나를 향해, 하지만 시선을 똑바로 맞추지 못한 채 말했다.
“아, 아까는 갑자기 때려서 미안했습니다. 그 대신…… 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이게 두 번째 방법입니다.”
키아는 그 후에도 무엇인가 말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져서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가슴을 만져주세요.
4.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키아의 가슴은 예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그러나 완벽한, 만약 종교인이라면 법열法悅을 느끼고 말 것만 같은, 종교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지극히 당연할, 본래 지상에 있어서는 안 될,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첫 대면에 가슴 만지게 해달라고 앙앙거렸던 이유가 납득이 갈 정도의, 오직 Divine이라는 말로만 형용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성스러운 가슴이었다.
음, 틀림없어. 키아의 제안에 따른다면 나는 정말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거다.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올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사실 기억이 날아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강한 충격이겠지.
“이렇게 매력적인 유혹은 처음 듣지만……, 미안. 거절할게.”
키아가 당황한 얼굴이 된다. 그 표정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푹 찔러봤다.
“공주병.”
키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홱 하고 이불을 끌어당겨 뒤집어썼다. 그대로 침대를 나와 도망치려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쓰러졌다. 부끄러움이 제곱이 되었는지 제대로 일어나지도, 이불을 벗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이불 끝자락을 붙잡아서 도망치려는 키아를 막았다.
“저기 말야, 알고 싶은 게 있어.”
이불 속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 말야,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까 아직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을 안 했어. 그야 태도를 보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지만.”
어느 정도만 알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넘쳐날 정도로 알 수 있다.
“그래도 역시 가슴을 만져달라거나 하는 말을 꺼내기는 부끄러운 거잖아. 지금도 굉장히 부끄러운 것 같고. 나는 네가 그런 부끄러움까지 감수하면서 기억을 되살려 주고 싶을 정도의 사람이었어?”
아주 작은 소리가 이불 밑으로 힘겹게 기어 나왔다.
“……네.”
“정말? 기억이 없는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나라는 녀석 너무 엉망진창이잖아. 일단 성추행은 확실한 것 같고,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인정하긴 싫지만 남자관계……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취미도 이상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녀석을 좋아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걸.”
“그,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점을 말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런 걸 말하는 건 부끄러우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런 장점이 있으니까 이런 단점을 받아들여 달라는 건 양심 없는 짓 아닐까.”
키아가 조금 멈칫하더니, 계속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벗었다. 방금까지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정한 모습. 이건 그녀의 천성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씀하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기억 같은 거 되찾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해서. 기억상실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전의 나를 이해할 수가 없거든. 바르게 살았다곤 생각할 수 없고, 그 기억을 찾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
키아는 아연해하는 기색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좋지 않은 방법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 씨가 안전한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그게 아냐. 위험하건 아니건 내키지 않는다니까.”
차라리 지금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일시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지금의 나는 기억상실 이전과는 다른 것 같다. 키아를 끌어안았을 때도 두근거림은 있었지만 두 사람이 말했던 것 같은 트러블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더 침착한 것 같고, 무엇보다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있다.
차라리 지금의 내가 더 낫지 않을까? 더 좋은 녀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안심시키려고 하는 건 아닙니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자신의 문제만 걱정하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과거의 기억이라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야. 너희들에게 들은 얘기를 총합한 다음, 거기에서 아무리 긍정적인 상을 끌어내봤자, 곁에 있는 사람 울리는 것밖에 상상되지 않아. 그런 기억은 없는 게 나아.”
차라리 지나간 일은 모두 흘려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럼 적어도 분수에도 맞지 않는 꿈을 꾸어서 생기는 실수는…….
키아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누굽니까?”
“응?”
“죄송하지만 전 당신 같은 사람 모릅니다.”
“자, 잠깐만?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미안. 사과할게. 그야 너와 관련된 기억도 있는데 그걸 없는 게 낫다고 말했으니까 화가 낫겠지만…….”
키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했다.
“엘리야 씨는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망각이란 후회의 산물, 또는 후회가 주는 선물이라고. 자폭이라는 형태로 이노센트의 일부를 뒤집어 쓴 이상,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억 상실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자기 자신을 후회하고,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는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요.”
“잠깐만. 그건 뭔가 너무 한 것 같은데……. 잊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 기억상실 상태야. 그렇게 막 ‘나의 카란은 이렇지 않아!’하고 억지로 밀어붙이면 솔직히 좀…….”
자신이 하는 말이 변명이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닫았다. 키아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기억을 잃어도, 어떤 일을 겪어도, 당신이 결코 하지 않을 말을 했으니까요.”
무슨 말이었을까.
뭐가 잘못되어서 그녀는 내가 ‘카란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걸까.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기억의 유무가 아니다. 기억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문제다. 카란에게 있어서 그건 본능일 거라고 키아는 말했다. 본래는 기억의 영역에 있어야 할 맹세를, 본능에 다시 썼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거창한 짓을 할 수 있었다는 것보다, 그런 사람이 틀림없다고 확신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더욱 큰 질투를 느꼈다.
나는 백기를 들었다.
“맞췄습니다. 아쉽게도 전 카란이 아니라 그 몸에 달라붙은 망각의 이노센트 한 토막이랍니다. 마침 이렇게 된 김에 이놈에게 빌붙어서 살아가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젠장!”
덧붙이자면 각성 계기는 그 보디블로였다. 자폭 직전에 키아에게 얻어맞은 일격의 아픔이 되살아났거든. 쳇쳇. 너무 빨리 들통나버려서 분하다.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깽판 쳐주겠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안 될 것 같네. 이 녀석, 허약한 주제에 정신 내성만은 쓸데없이 단단해……. 역으로 침식당하고 있어…….”
“……네. 정말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키아는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딱딱한 표정일 때도 미인이지만 긴장감이 풀어진 지금은 더 예뻤다.
아, 진짜 뭐야. 조금만 더 잘 속였으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금방 자기를 인정받으려다 지뢰를 밟아버렸다. 망각은 후회의 산물이라더니 사실인가보다. 나 지금 맹렬하게 후회중이야.
……뭐, 저 정도 웃는 얼굴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할까.
“자, 그럼 그 새파란 불로 샤워 좀 부탁해. 그럼 나도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 녀석에게 침식당하는 기분이야.”
카란의 몸에서 빠져나와 키아의 곁을 맴돌았다. 아,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키아가 가슴 만져보라고 할 때 응할 걸! 그렇지만 그랬다간 카란 녀석이 잽싸게 완전부활 할 것 같았단 말야! 젠장! 젠장젠장젠장! 미안합니다! 실은 나도 똑같은 놈이었나봐요! 침식 탓일 텐데!
키아의 손에서 푸른 불길이 피어올랐다. 성창염이라고 부르는, 인류를 사악에서 수호한다는 신비한 힘을 가진 불길이다. 묘하게 따뜻한 그 불길을 뒤집어쓰고 있자니, 지상에 와서 인간의 상념들에게 침범 받았던 몸이 씻기기 시작했다.
- 자, 잠깐! 그러고 보니까……!!!
생각해보면 키아가 카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대답을 듣지 못했다. 뒤늦게 외쳐봤지만 그 때는 이미 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상태였다.
하지만 뭐, 짐작은 갔다.
내가 빠져나온 이후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카란을 조심스럽게 받아드는 키아의 표정을 보면 모를 수가 없지.
5.
카란은 몇 시간 후에 눈을 떴다.
침대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키아가 다급히 달려들어 이상한 사실을 물었다.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제 이름은 기억납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납니까? 던하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듭니까.
카란. 키아. 망각의 이노센트랑 싸우다가 그 녀석이 자폭하는데 네가 내 앞을 감싸려고 해서 내가 네 앞을 가로막았어. 생각해보니까 바보짓이었던 것 같아. 던하르? 던하르? 으아아아아아아악! 어째서 잠에서 깨자마자 그 놈 이름이 나오는 건데?!
키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카란이 반발했다. 대체 뭐가 다행인데!
키아가 기다리다 잠든 재희를 깨우러 가려는데 카란이 문득 질문했다. 그런데 말야. 나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아. 네가 옷을 풀어헤치고 가슴을 만져달라고 유혹하는…….
그러나 카란이 그 꿈의 내용을 다시 돌이키는 일은 없었다.
카란은 그 다음 순간 번개처럼 달려든 키아에게 폭풍 같은 보디블로 3연타를 맞고 이 시기의 일을 산뜻하게 잊고 말았다.
Forget you not,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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