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 기념 『일편흑심』 외전 「Forget you not」.

 0.
 
 이 이야기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났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는,
 만우절 거짓말 한 토막입니다.
 
 
 1.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침구는 하나같이 새것이었고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몸을 일으켜서 주위를 확인해보자 고급스러운 건 침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방 안에 놓인 가구들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모두 간직한 초 고급품이었다.
 “무슨 왕궁에라도 와 있는 걸까.”
 자기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어쩐지 멀게 느껴져서 조금 갸웃했다. 신기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온 것 같은데. 잠에서 덜 깨서 메마른 목소리가 나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방 한 쪽엔 고풍스러운 가구들 사이에서도 튀지 않게 배치된 소형 냉장고가 있었다. 엉거주춤 침대에서 나와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을 한 통 꺼냈다.
 꼴깍꼴깍꼴깍. 원샷.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흐르면서 몸이 으스스 떨렸다. 이 서늘함이 멍한 머리를 낫게 해주길 기대했지만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았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방 안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방에는 문이 둘 있었다. 창가 반대쪽에 있는 커다란 문과 벽 구석에 설치된 작은 문.
 작은 문을 열자 그 안은 개인 욕실이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수온을 조절한 다음 세안을 했다. 타월로 물기를 닦아내고 세면대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 비친 것은 파란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눈에는 묘한 장난기가 어려 있다. 애교가 많다고 해야 할까, 표정이 다양할 것 같은 얼굴이다.
 생긋 웃으며 말해봤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대답해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밖으로 나가야겠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질문해야겠다.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아니, 철학적인 담론을 하자는 게 아니라, 내 이름이라든가 주소지라든가…….
 큰 문이 벌컥 열렸다.
 두 명의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소녀는 1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풍성하게 웨이브진 머리카락과 부드럽고 통통해 보이는 뺨이 매력적인 소녀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이쪽의 기분까지 기쁘게 만든다. 지금은 어쩐지 조금 가라앉은 표정이었지만.
 다른 소녀는 대조적으로 훤칠한 키였다. 170cm를 넘을지도 모르겠다. 훤칠한 키나 진지하고 엄격한 시선과 달리 아직 어린 티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얼굴. 머리카락에는 살짝 붉은 빛이 감돌았다.
 작은 소녀가 내쪽을 향해 물었다.
 “카란 씨? 괜찮아? 기억 멀쩡해?”
 적어도 자신이 누군지를 찾아 끝없는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 아무 것도 기억 안 나.”
 큰 소녀가 무척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2.
 
 작은 소녀의 이름은 재희라고 했고, 큰 소녀의 이름은 키아라고 했다. 믿을 수 없지만 둘은 동갑이었다. 재희 쪽이 동안……이라기보다는 상당히 미성숙한 느낌이었지만.
 재희와 키아는 번갈아가며 나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름은 카란. 인간은 아니고 바이스Vice라는 이상한 종족. 자신을 향한 타인의 애정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 두 소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잠깐만, 나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키아가 답했다. 여고생답지 않게 딱딱한 말투가 그녀의 습관인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거야? 그, 누군가가 내게 애정을 줘야 하는 거잖아?”
 “어떻게 살다니? 그야 우리들이…….”
 “같은 여자끼리라도 상관없는 거야? 살아가는데 중요한 문제니까 확인을 해 둬야 하잖아.”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재희가 갑자기 환한 미소를 띄웠다.
 “응. 당연하잖아. 애정에 남녀노소가 어딨어? 카란 씨랑 키아, 백합이었어!”
 “무, 무슨 소리를……!”
 키아가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냈다.
 “쉿! 카란 씨가 혼란스러워하잖아. 기억상실이라 어지러울 텐데 더 헷갈리게 해야 해?”
 키아는 그 말에 잠깐 나를 바라보고, 안절부절 못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나를 보고, 결국 고개를 숙인 채 ‘네’라고 말했다.
 “내 눈앞에서 당당하게 사기극이 펼쳐지는 것 같은데.”
 내가 찌르자 재희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백합이라는 건 여성끼리의 러브리한 관계를 말하는 거거든. 속어, 가 아니라 은어구나 은어! 키아는 그런 거 좀 부끄러워해.”
 “그래? 예쁜 말인 것 같은데. 어쩐지 청초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들고.”
 “더 자세히 파고들면 좀 많이 복잡하지만, 아무튼 사람마다 백합에 대한 이미지는 다르거든. 말하자면 키아는 원리주의쪽일까. 나는 흑백합파고, 카란 씨는 사실 ‘그런 건 백합이 아냐!’라고 돌 맞기 딱 좋은 위험한 노선. 사도邪道? 아니, 마도魔道?”
 자세히 캐묻기가 무섭다. 일단 최소한의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알겠어.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마워.”
 재희와 키아가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웠다.
 “나는 네가 사랑 해줘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거잖아?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 도리가 아닐까 싶어서.”
 “……카란 씨, 기억만 날아간 게 아닌 것 같아.”
 “실례입니다!”
 재희의 말에 키아가 급히 반발했다. 딴전을 피우는 재희를 다그쳐 사과하게 하더니, 자신도 사과의 말을 해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맙다는 건 제가 해야 할 말입니다. 당신의 기억이 사라지게 된 건 제 탓이니까.”
 
 대략 사흘 정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나와 키아는 ‘망각’의 이노센트와 싸웠다고 한다. 이노센트란 건 또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가 되어서 좀 복잡해졌지만, 알기 쉽게 말하면 정령 같은 거라고 한다. 칼의 이노센트는 칼질을 잘한다거나 칼을 만든다거나 하는 일을 하고, 불의 이노센트는 아무튼 뭔가 불태운다고 한다.
 그리고 망각의 이노센트는, 물론 무엇인가를 잊게 만든다.
 격전 끝에 망각의 이노센트를 격파했다고 생각한 순간, 망각의 이노센트가 자폭공격을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공격에서 키아를 감쌌지만, 그 이후 정신을 잃어 계속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내 상태를 점검한 엘리야라는 소녀 마법사는, 내 육체는 멀쩡하지만 그 기억에는 심각한 손상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현실이 되어버린 것 같고.
 “그러니까 당신의 기억상실은 제 탓입니다.”
 “그럴 리가.”
 나는 웃었다.
 키아의 목소리는 무감정했지만 살짝 숙인 고개와 떨리는 손은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억이 없으면서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내가 원해서 널 감싼 거잖아? 그게 왜 네 탓이야? 게다가 너랑 내가 백합 관계였다는 말은 서로 좋아했다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을 감싸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키아의 얼굴에서 엄격함의 가면이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그녀가 안쓰러워서 끌어안았다. 몸이 닿는 순간 얼어붙은 그녀의 등을 작게 두드리며 달랬다.
 “걱정마. 나는 계속 곁에 있을게. 항상 널 지켜줄게.”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 말을 해버렸다고 생각하는데 키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키아는 이런 말에 약한 걸까? 좀 더 부끄러운 말을 해볼까 생각하는데 재희가 살짝 가시가 있는 말을 뱉었다.
 “그럼 카란 씨는 몸이 여러 개 필요하겠네.”
 “응?”
 “실은 카란 씨랑 백합이었던 건 키아만이 아니거든! 엘리야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던하르 씨도 있고. 아, 던하르 씨는 백합 아니다?”
 응?
 응응?
 “어, 저기, 그 말대로라면 그건 마치 내가 바람, 아니 문어발을 뻗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응. 사실인걸.”
 키아를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노, 농담 참 무섭네. 그런 농담을 정색하고 말하는 거 아냐.”
 “그렇지만 사실이야? 키아에게 물어봐도 괜찮아.”
 나는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키아를 바라보았다. 저 무뚝뚝한 말투의 소녀가 설마 저기 동조해서 거짓말을 하진 않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키아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재희는 거기에다 결정타까지 날렸다.
 “사실 키스는 던하르 씨랑 했고.”
 “나,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야…….”
 기억상실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뒤늦게 깨달았다.
 
 기세를 탄 재희는 쉬지 않고 기억 상실 이전의 내가 얼마나 나쁜 녀석이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키아 만나서 한 말은 아마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였지?”
 “……어, 어딘가 다른 나라말로 ‘안녕하세요’라는 의미가 아닐까?”
 희망을 말해봤지만 아무래도 다른 우주의 말이 아니면 그런 착각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다음엔 실제로 만지려고 하다가 키아에게 죽도록 맞았어.”
 “맞아도 싸…….”
 “그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어.”
 “왜 그 끈기를 좋은 방향으로 쓰지 않았던 거야!”
 “너무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중엔 맞으면서 느끼는 체질이 되고 말았어.”
 “거, 거짓말……?!”
 키아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키아는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변명해줄 구석이 없는 것임을 이해했다.
 “한 번은 거대한 촉수괴물이 되어서 우리를 덮친 적도 있었어.”
 “이건 1200% 거짓말이야!”
 “……이, 있었습니다, 그런 적도.”
 “키아가 샤워하는데 일부러 들어간 적도 있었어. 키아 알몸인 거 뻔히 알면서도 계속 있었고.”
 “범죄잖아! 이미 몇 번이나 범죄였던 것 같지만! 아니, 여자끼리니까 괜찮……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나 키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끔찍해하는 것 같다. 맙소사. 여자끼리라도 범죄는 범죄다.
 “애초에 우리들이 사는 기숙사에 무단 침입했지?”
 “그, 그거라면 저희들이 불렀다고 해야 맞지 않습니까.”
 키아가 간신히 변명해주었다. 하지만.
 “사실 충격받을 것 같아서 말 안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카란 씨, 사실은 남자야.”
 “뭐?!!!”
 “그래. 못 믿겠지? 그 얼굴, 부드러운 살결, 애교 있는 동작, 어딜 봐도 뛰어난 미소녀인 카란 씨. 하지만 남자야.”
 나는 당황해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환자복에 가까운 풍성한 파자마. 성별을 특정할 복장은 아니다. 기억을 잃었어도 자기 몸은 자기 몸이니까 새삼스럽게 뭐가 달렸는지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얼굴만 보고 여자라고 생각했다…….
 재희가 최후의 공격을 날렸다.
 “첫 키스는 남자인 던하르 씨랑 했던 카란 씨. 하지만 남자야.”
 “나는 대체 뭐하는 녀석인 거야!!!”
 
 
 3.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나는 내 것이었다는 휴대전화를 받아 그 통화, 문자내역을 확인했다. 난감하게도 사용내역이 극히 적고 방금 들은 것들을 확정 지을만한 내용은 없다.
 사진함을 뒤져보자 어째서인지 치파오를 입고 찍은 사진이라든가, 여자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라든가, 여자 수영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라든가 밖에 없었다.
 “아, 아니, 잠깐……. 다른 건 몰라도 수영복은 어떻게……. 물리적으로 무리수가…….”
 “그걸 저희에게 물어도 곤란합니다만…….”
 “‘몇 백 년 간 해온 여장이다. 들킬 리가 없지!’라고 거만하게 말했어.”
 난 여장을 몇 백 년 동안이나 해 온 건가. 대체 어째서.
 아니아니,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푸념을 해도 소용없다. 이렇게 되면 직접 캐묻는 수 밖에 없겠지.
 나는 전화번호부에 있는 사람들 전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죄송합니다만, 저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써서.
 
 엘리야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제가 한 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사건을 일으키는 골칫덩어리. 부탁이니 돌아갈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세요, 오라버님.] - 어쩐지 무섭다.
 류시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주위의 아가씨들 모두를 꼬드기고 있으면서 제게는 이상하게 거리를 두는 분이죠. 교복 페티시가 아닐까 걱정되네요.] - 교복을 입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던하르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어~~~~~] - 엘리야의 답장보다 더 무서웠다.
 Kill You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하렘이라는 태양을 향해 배덕의 날갯짓을 하는 청초한 이카로스. 가시덤불에 떨어져 그 날개가 붉게 물들어도 계속 날아올라주세요! 대기권돌파요망! 그리고 스승님을 잘 부탁해요!] - 총체적으로 해독불능.
 
 “재, 재희 너는?”
 “음. 귀여워. 촉이 좋달까, 민감해서 찌르는 맛이 있어. 반응도 재밌고. 멋있을 때도 가끔은 있고. 배려심도 있고 눈치도 있으니까 두 번째 첩으로 두면 딱 좋겠네!”
 눈물이 난다.
 “그럼 이제 키아도 말해줘야지?”
 재희는 웃으며 키아에게로 바톤을 넘겼다. 나도 마지막 희망을 품고 키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키아는 한참을 주저했지만 나와 재희가 발하는 ‘대답해라 대답해’ 광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저는…….”
 
 -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어라?
 의아해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연지 씨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가, 갑자기 무슨 말인가요, 하란 양? 의미를 잘 모르겠는데, 혹시 사회적인 입장에서의 자신에 대한 질문인가요 아니면 제가 개인적으로 하란양]
 연지 씨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2.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연지 씨라는 인물이 보내온 답장 3.
 [시, 실수로 전송버튼을 눌러버렸어요. 미안해요. 놀라진 않았죠? 저는 하란 양의 학업이나 평소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른스럽고 상냥한]
 연지 씨라는 인물이…… 그냥 이어서 쓰자.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어요. 성실하고 배려심이 있을 것 같아요. 앗, 혹시 그런 건가요?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거기 대해서 화가 났다든가? 그렇죠?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죠? 사실은 어른스럽게 있는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고 이리저리 스트레스도 쌓이지만 그걸 내색하지 않는 건데, 실은 선생님도 나이는 들었지만 전혀 어른스럽지 못하거든요. 어른스럽다는 게 사실은 절대 쉽게 얻을 수 있는 평가가 아닌데……. 만약 그런 걸로 고민 중이라면 안 하던 일을 해 보는 게 좋아요. 주위 사람들의 평가가 자신의 천성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자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위험하거나 나쁜 일은 안 되지만, 그런 변화를 주는 걸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시 정의될 수도 있거든요.]
 “연지 씨라는 분은 선생님이야?”
 “응. 선생님이 보내셨어?”
 “응……. 엄청난 교육자 정신이 느껴지네.”
 하란 양이란 건 누구냐는 의문이 생겼지만 입에는 담지 않기로 했다. 이 이상 문제를 늘리고 싶지 않다.
 
 -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어라라?
 다시 한 번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메시지함을 확인했다.
 [마, 만약에,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라면……, 앞에서 말한 것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저는 하란 양의 그런 모습이 참 좋]
 [좋아요.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아니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니까 어쩐지 더 이상하게 된 것 같은데]
 [미안해요. 갑자기 문자메시지를 받아서 조금 당황했나 봐요. 너무 길어졌으니까 답장 보내달라고는 안 할게요. 응원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세요]
 얼마나 강하게 응원하고 계시는 거예요, 연지 씨…….
 어질어질한 정신을 추스르고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뗐다.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서 휴대전화의 내용을 훔쳐보던 키아와 재희가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은 여전히 머릿속이 꽃밭이네……. 카란 씨는 이런데.”
 재희의 목소리에 나를 규탄하려는 기색은 섞여있지 않았지만 어딘가 김이 빠진 듯 했다. 키아가 약하게 동의했다.
 “그, 그렇습니다. 좀 곤란합니다…….”
 “아무래도 좀 과격한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아. 키아는 잠깐 나 좀 봐. 카란 씨는 좀 기다리고 있고.”
 재희는 키아를 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침대에 몸을 던져 드러누운 다음 지금까지 들은 정보를 정리해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타인의 애정을 먹고 사는 존재로, 여장을 귀신같이 해내고, 하렘을 꿈꾸고 있으며, 키스는 남자랑 했고, 그 남자에겐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는 얘기를 듣고, 누군가는 둘째 첩으로 삼고 싶다고 하고, 기타기타 등등등등.
 죽을까.
 점차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가 너무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한참 후에 키아가 다시 방 안에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재희는 따라 들어오지 않고, ‘파이팅!’이라는 말만 남기곤 문을 닫았다.
 키아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쭈뼛거리며 침대까지 다가와서는, 어째서인지 내 발끝만 보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재희랑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다, 당신의 기억상실을 낫게 할 방법에 대해서 대화를 했습니다.”
 “방법이 있어?”
 키아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좀 더 기다렸다. 계속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키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방법들은 효과가 의심됩니다. 차라리 엘리야 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오라버님이라고 불렀던 그 소녀는 그리스에 가서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를 찾고 있다고 한다. 스케일이 너무 커져서 아찔해지려는 찰나, 정확히는 므네모시네를 섬기는 약초사의 전승을 찾는 것이라는 정정이 들어왔다.
 현실감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쪽은 100여 년 전에 엘리야가 직접 만난 적이 있는 마법학파라고 한다. 적어도 100년 전에는 있었던 게 확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얘기를 들어도 안심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0년 지나서 어떻게 찾아낸다는 걸까.
 “차라리 다른 방법이 낫지 않을까. 효과가 좀 의심되더라도 저렇게 시간 오래 걸리는 건 아닐 거 아냐. 설마 비슷해?”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해보자.”
 키아는 내가 말한 이후에도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슬리퍼를 벗고 침대 위에 올라와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서로가 내뱉는 호흡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어? 무슨 방법인데 이렇게까지 밀착하는 거야.”
 “미안해요, 카란. 용서하세요.”
 괜히 나까지 긴장된다고 말하려던 그 순간, 키아가 내 허리에 한 팔을 감았다. 그리고……,
 
 초근접 거리에서 맹렬한 보디블로를 먹였다.
 
 본래대로라면 날 벽까지 날려버리고도 남을 위력이었지만 허리에 감긴 키아의 팔이 그걸 막았다. 다시 말해 충격은 어딘가 분산되거나 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복부에 전달되었다는 소리다.
 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키아가 당황해하며 날 붙잡고 등을 문질러주었다. 그 손길에 후회로 가득하다는 것만은 그 정신없는 도중에도 알 수 있었지만, 대체 왜……!
 숨소리도 못 내고 꺽꺽거리던 것이 간신히 나아졌을 때, 나는 키아에게 항의했다.
 “뭐, 뭐하는 거야……. 왜 날 암살하려고…….”
 “미,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기억은 역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있던 기억도 날아가겠다! 대체 왜 보디블로로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거야!”
 “재희가 기억상실에는 강한 충격을 주거나 익숙한 일상을 체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이 방법이면 둘 다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한 충격은 알겠어. 그런데 일상이라고? 이렇게 맞고 지내는 게 일상이라고?!”
 분명히 그런 이야기도 했지만…….
 “아, 아무래도 좋아! 하다못해 경고라도 해줄 수 있지 않았냐고!”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말해버리면 충격이 덜해져서 효과가 없을 거라고…….”
 “각오한다고 충격이 줄어들 수준이 아니거든.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거든…….”
 뼈와 살, 아니 영혼까지 분리된다고 밖에는 형용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쩔쩔매는 키아가 너무 보기 안쓰러웠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 문제를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으으,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안 위험한 걸로…….”
 키아는 틀림없이 ‘다른 방법들은 효과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방법들. 복수형이다.
 내가 그 말을 꺼내자 키아는 아까보다 더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거구나? 위험한 거야?”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프긴 하지만 후유증은 남지 않으니까 위험하지 않다…… 같은 건 아니지?”
 “그것도 아닙니다. 아닙니다만…….”
 키아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힘겹게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어딘가 비장감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라서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대체 무슨 방법인데 그래?”
 키아는 대답하지 않고 세 번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행동에 들어갔다.
 키아는 지금 하얀 블라우스 위에 조끼를 입고, 교칙대로 길이를 맞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춘추복에 해당하는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그 조끼를 벗어서 침대 한 쪽에 내려놓았다.
 의아해하는 내 앞에서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하나, 둘, 옷깃 사이로 브래지어가 보이기 시작했고, 셋, 가슴의 트임이 넓어져 앙가슴이 완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네……개째를 풀려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주저주저하던 키아는 결국 손을 내려놓고 나를 향해, 하지만 시선을 똑바로 맞추지 못한 채 말했다.
 “아, 아까는 갑자기 때려서 미안했습니다. 그 대신…… 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이게 두 번째 방법입니다.”
 키아는 그 후에도 무엇인가 말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져서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가슴을 만져주세요.
 
 
 4.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키아의 가슴은 예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그러나 완벽한, 만약 종교인이라면 법열法悅을 느끼고 말 것만 같은, 종교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지극히 당연할, 본래 지상에 있어서는 안 될,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첫 대면에 가슴 만지게 해달라고 앙앙거렸던 이유가 납득이 갈 정도의, 오직 Divine이라는 말로만 형용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성스러운 가슴이었다.
 음, 틀림없어. 키아의 제안에 따른다면 나는 정말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거다.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올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사실 기억이 날아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강한 충격이겠지.
 “이렇게 매력적인 유혹은 처음 듣지만……, 미안. 거절할게.”
 키아가 당황한 얼굴이 된다. 그 표정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푹 찔러봤다.
 “공주병.”
 키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홱 하고 이불을 끌어당겨 뒤집어썼다. 그대로 침대를 나와 도망치려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쓰러졌다. 부끄러움이 제곱이 되었는지 제대로 일어나지도, 이불을 벗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이불 끝자락을 붙잡아서 도망치려는 키아를 막았다.
 “저기 말야, 알고 싶은 게 있어.”
 이불 속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 말야,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까 아직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을 안 했어. 그야 태도를 보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지만.”
 어느 정도만 알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넘쳐날 정도로 알 수 있다.
 “그래도 역시 가슴을 만져달라거나 하는 말을 꺼내기는 부끄러운 거잖아. 지금도 굉장히 부끄러운 것 같고. 나는 네가 그런 부끄러움까지 감수하면서 기억을 되살려 주고 싶을 정도의 사람이었어?”
 아주 작은 소리가 이불 밑으로 힘겹게 기어 나왔다.
 “……네.”
 “정말? 기억이 없는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나라는 녀석 너무 엉망진창이잖아. 일단 성추행은 확실한 것 같고, 여자관계도 복잡하고, 인정하긴 싫지만 남자관계……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취미도 이상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녀석을 좋아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걸.”
 “그,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점을 말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런 걸 말하는 건 부끄러우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런 장점이 있으니까 이런 단점을 받아들여 달라는 건 양심 없는 짓 아닐까.”
 키아가 조금 멈칫하더니, 계속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벗었다. 방금까지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정한 모습. 이건 그녀의 천성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씀하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기억 같은 거 되찾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해서. 기억상실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전의 나를 이해할 수가 없거든. 바르게 살았다곤 생각할 수 없고, 그 기억을 찾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어.”
 키아는 아연해하는 기색을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좋지 않은 방법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 씨가 안전한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그게 아냐. 위험하건 아니건 내키지 않는다니까.”
 차라리 지금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일시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지금의 나는 기억상실 이전과는 다른 것 같다. 키아를 끌어안았을 때도 두근거림은 있었지만 두 사람이 말했던 것 같은 트러블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더 침착한 것 같고, 무엇보다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있다.
 차라리 지금의 내가 더 낫지 않을까? 더 좋은 녀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안심시키려고 하는 건 아닙니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자신의 문제만 걱정하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과거의 기억이라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야. 너희들에게 들은 얘기를 총합한 다음, 거기에서 아무리 긍정적인 상을 끌어내봤자, 곁에 있는 사람 울리는 것밖에 상상되지 않아. 그런 기억은 없는 게 나아.”
 차라리 지나간 일은 모두 흘려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럼 적어도 분수에도 맞지 않는 꿈을 꾸어서 생기는 실수는…….
 키아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누굽니까?”
 “응?”
 “죄송하지만 전 당신 같은 사람 모릅니다.”
 “자, 잠깐만?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미안. 사과할게. 그야 너와 관련된 기억도 있는데 그걸 없는 게 낫다고 말했으니까 화가 낫겠지만…….”
 키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했다.
 “엘리야 씨는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망각이란 후회의 산물, 또는 후회가 주는 선물이라고. 자폭이라는 형태로 이노센트의 일부를 뒤집어 쓴 이상,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억 상실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자기 자신을 후회하고,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는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요.”
 “잠깐만. 그건 뭔가 너무 한 것 같은데……. 잊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 기억상실 상태야. 그렇게 막 ‘나의 카란은 이렇지 않아!’하고 억지로 밀어붙이면 솔직히 좀…….”
 자신이 하는 말이 변명이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닫았다. 키아는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기억을 잃어도, 어떤 일을 겪어도, 당신이 결코 하지 않을 말을 했으니까요.”
 무슨 말이었을까.
 뭐가 잘못되어서 그녀는 내가 ‘카란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걸까.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기억의 유무가 아니다. 기억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문제다. 카란에게 있어서 그건 본능일 거라고 키아는 말했다. 본래는 기억의 영역에 있어야 할 맹세를, 본능에 다시 썼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거창한 짓을 할 수 있었다는 것보다, 그런 사람이 틀림없다고 확신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더욱 큰 질투를 느꼈다.
 
 나는 백기를 들었다.
 “맞췄습니다. 아쉽게도 전 카란이 아니라 그 몸에 달라붙은 망각의 이노센트 한 토막이랍니다. 마침 이렇게 된 김에 이놈에게 빌붙어서 살아가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젠장!”
 덧붙이자면 각성 계기는 그 보디블로였다. 자폭 직전에 키아에게 얻어맞은 일격의 아픔이 되살아났거든. 쳇쳇. 너무 빨리 들통나버려서 분하다.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깽판 쳐주겠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안 될 것 같네. 이 녀석, 허약한 주제에 정신 내성만은 쓸데없이 단단해……. 역으로 침식당하고 있어…….”
 “……네. 정말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키아는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딱딱한 표정일 때도 미인이지만 긴장감이 풀어진 지금은 더 예뻤다.
 아, 진짜 뭐야. 조금만 더 잘 속였으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금방 자기를 인정받으려다 지뢰를 밟아버렸다. 망각은 후회의 산물이라더니 사실인가보다. 나 지금 맹렬하게 후회중이야.
 ……뭐, 저 정도 웃는 얼굴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할까.
 “자, 그럼 그 새파란 불로 샤워 좀 부탁해. 그럼 나도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 녀석에게 침식당하는 기분이야.”
 카란의 몸에서 빠져나와 키아의 곁을 맴돌았다. 아,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키아가 가슴 만져보라고 할 때 응할 걸! 그렇지만 그랬다간 카란 녀석이 잽싸게 완전부활 할 것 같았단 말야! 젠장! 젠장젠장젠장! 미안합니다! 실은 나도 똑같은 놈이었나봐요! 침식 탓일 텐데!
 키아의 손에서 푸른 불길이 피어올랐다. 성창염이라고 부르는, 인류를 사악에서 수호한다는 신비한 힘을 가진 불길이다. 묘하게 따뜻한 그 불길을 뒤집어쓰고 있자니, 지상에 와서 인간의 상념들에게 침범 받았던 몸이 씻기기 시작했다.
 
 - 자, 잠깐! 그러고 보니까……!!!
 
 생각해보면 키아가 카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대답을 듣지 못했다. 뒤늦게 외쳐봤지만 그 때는 이미 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상태였다.
 
 하지만 뭐, 짐작은 갔다.
 내가 빠져나온 이후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카란을 조심스럽게 받아드는 키아의 표정을 보면 모를 수가 없지.
 
 
 5.
 
 카란은 몇 시간 후에 눈을 떴다.
 침대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키아가 다급히 달려들어 이상한 사실을 물었다.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제 이름은 기억납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납니까? 던하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듭니까.
 카란. 키아. 망각의 이노센트랑 싸우다가 그 녀석이 자폭하는데 네가 내 앞을 감싸려고 해서 내가 네 앞을 가로막았어. 생각해보니까 바보짓이었던 것 같아. 던하르? 던하르? 으아아아아아아악! 어째서 잠에서 깨자마자 그 놈 이름이 나오는 건데?!
 키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카란이 반발했다. 대체 뭐가 다행인데!
 키아가 기다리다 잠든 재희를 깨우러 가려는데 카란이 문득 질문했다. 그런데 말야. 나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아. 네가 옷을 풀어헤치고 가슴을 만져달라고 유혹하는…….
 
 그러나 카란이 그 꿈의 내용을 다시 돌이키는 일은 없었다.
 카란은 그 다음 순간 번개처럼 달려든 키아에게 폭풍 같은 보디블로 3연타를 맞고 이 시기의 일을 산뜻하게 잊고 말았다.
 
Forget you not, 終.

[크리스마스 기념 단편] - 거절소양의 Poor Snow.

 0.

 천명도天明島.
 동해에 위치한 섬이다.
 총 면적 260.7㎦, 거주민 약 6만 명.
 거주민 98%가 〈국립 이능계열 특수목적교육기관 천명학원天明學園〉의 학생이며, 남은 2%는 자원봉사자와 상인, 그리고 극소수의 군인이다.

 천명학원.
 이능력자들을 교화/수용하기 위한 특수시설. 초중고 수업을 전부 포함하고 있다.
 흔히 졸업할 수 없는 학교로 알려져 있으나 언제라도 지원할 수 있는 졸업시험에서 100점을 받거나, 반년 이상 침식률 0%를 유지하면 졸업할 수 있다.
 자원봉사자에 의한 강습을 제외하면 모든 수업은 원격으로 이루어지며, 학교의 운영 역시 학생자율에 의해 맡겨지고 있다. 정부는 이 학원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관여하지 않으며, 또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단 학원 내의 무질서도가 일정 수준을 넘었을 때 천명도는 이능을 포함한 포격에 의해 강제 소각된다. 이것은 천명도 거주민 전원이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무서운 배경을 깔고 있는 천명도지만 거기에도 사랑하는 소년소녀가 있다. 한없이 뒤틀렸어도 청춘은 청춘, 풋풋한 연정은 어디에서나 피어나는 법이다. 크리스마스 강설확률 0%인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아무리 분위기 좋은 장소를 찾아봐야 늘 보던 섬 안인 건 또 어떻단 말인가. 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세상이 자신들의 것이거늘.

 물론 사랑하는 소년소녀가 있다면 질투하는 소년소녀도 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질투하는 소년소녀가 모인 〈천명학원 쌍극파괴단雙極破壞團〉(통칭 쌍극단. 쌍극을 ‘쌍것’으로 읽어주면 좋아함)이 201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벌인 「Poor Snow 작전」, 후세에 「바벨 대공방」으로 기록된 전투에 대한 기록이다.


 1.

 거절.
 나이 17세, 학업평가 A+, 연애 경험 3회.
 쌍극단 내에서는 상위 1% 안에 들어가는 높은 실적이지만, 그 결과는 3회 모두 상대의 박살. 이후 쌍극단에 투신했다.
 적에게는 냉정하고 단호하지만 아군에게는 침착하고 신뢰를 주는 성격으로 휘하의 신뢰도는 극히 높다. 현재는 쌍극단 무투파의 정점이다.

 크리스마스 대공세에 대한 전략회의 내내 그녀는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산타클로스는 불화를 선물했습니다’ 작전을 쓰자니까! 좋다고 돌아다니는 쌍것에게 미니스커트 산타클로스를 보내서 사이를 끊어놓는 거야!”
 “여성 동지들에게 미니스커트를 입히고 싶은 것뿐이잖아!”
 “틀려! 나는 남성 동지들에게 미니스커트를 입히고 싶은 거다! 강하게 요동치는 둔근과 대퇴근이 보고 싶단 말이다!”
 “……우리 사이좋게 지낼래?”
 “감찰관. 이 배반자들을 처단해주세요.”
 물론 거절이 개인의 욕망과 조직의 목표를 착각하는 바보들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던 것은 아니다. 이 정도라면 몇 번이나 보아왔다.
 “게임부에서 계속 준비해 온 크리스마스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지? 누구라도 반하게 되는 궁극의 연인과 데이트하는 게임을 만들겠다면서.”
 “아……, 그게 말입니다……, 저기……, 개발진이 과연 궁극의 연인이란 무엇인가로 싸움을 시작했는데 서로 한 발짝도 물러서질 않아서……. 싸우다가 전부 병원에 가 있습니다…….”
 “서기. 게임부는 내년 예산을 전액 자력조달하겠다네요.”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것에도 익숙해져 있다. 스스로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쌍극단 멤버와 사교성은 좀 거리가 머니까. 사교성이 좋으면 여기가 아니라 〈연애수호련맹戀愛守護聯盟〉(통칭 연수련)에 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단장님은 왜 안 오시는 거죠?”
 쌍극단 단장 소양이 부재중이라서 전략회의를 자신이 주관해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소양.
 나이 18세, 학업평가 A+, 연애 경험 제로.
 3년 전,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으로 학원 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쌍극단의 단장이 되어 온건하고 평화스러운 방침으로 투쟁 방침을 전향했다. 파탄 일보직전이던 조직을 수습하고 세를 불려놓은 수완에 대해서는 거절 역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양을 생각할 때마다 불쾌감이 피어오르곤 했다.

 “미안. 실은 처음부터 있었어. 많이 기다렸어?”
 발밑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소리에 거절이 기겁했다. 소양은 회의실 테이블 아래에서 몸을 빼내고 일어나서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모두 미안해요. 새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난 후에 너무 피곤해서 한 숨 잔다는 게 그만. 저 없는 동안 회의 대신 주관해줘서 고마워, 거절 양.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털실 팬티는 이미지에 안 어울리니까 벗는 게 좋지 않을까?”
 “힙워머일 뿐이에요.”
 거절의 말은 얌전했지만 손은 빠르다. 소양에 대해서는 특히 빠르다. 외침과 동시에 소양은 회의실 끝부터 끝까지 날아서 벽에 처박혔다.
 “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네…….”
 “거짓말은 적당히 해주세요, 양치기 씨.”

 거절의 이능은 〈거짓말 절단기〉.
 소양의 이능은 〈소년 양치기〉.

 처음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거절은 처음부터 소양이 싫었다.
 예쁘장한 얼굴도 싫고 실실거리는 웃음도 싫고 거짓말을 섞지 않고는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그 성격이 싫었다. 과격하고 단순한 그녀와는 여러모로 극상성이다.
 그래도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신뢰하고 있었다. 거짓말하는 것, 어느 것이 본심인지 혼란스럽게 하는 것, 그것을 통해 충돌하는 자들 사이에 묘한 평형 상태를 만들어내는 솜씨에 대해서는 감탄할 정도였다.
 후임이고 인망도 모자랐던 그를 단장으로 적극 추천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가 쌍극단의 톱이었다면 최악의 상태에서도 그냥 들이받고, 그 대가로 조직을 멸망으로 밀어 넣었을 테니까. 성격이 썩었다는 평가를 취소할 생각은 없지만.
 결국 그녀가 소양에게 대하는 태도는 ‘매우 싫지만 그 유용성만은 인정하는’ 정도였는데, 오늘 그 태도가 바뀔 위험에 처하고 말았다.
 “드디어 단장님이 미치고 말았군요. 전 반대예요.”
 “응?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거절? 이상하네. 무투파가 그렇게 요청했던 크리스마스 대공세잖아. 그 일정에 맞추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거절의 손끝에 파직파직 스파크가 일었다. 거짓말이었다.
 울컥하는 기분이 일었다. 보나마나 몇 시간 만에 뚝딱뚝딱 만든 걸로 잘난 척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애써 억눌러 참았다. 이 이상 공개적으로 반발하는 건 좋지 않다. 지나치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녀 자신도 찬성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

 이능 〈소년 양치기〉의 힘은 매우 단순명쾌하다.
 이 이능의 보유자가 한 환상을 실재하는 도구로 만들어내는 발명가의 재능이다.
 규모가 크고 강력한 현실일수록 강한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 착실하게 거짓을 쌓아올려 부정 불가능한 현실로 만들어낸다. 본래는 〈소원 바라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이능이지만, 소양이 그 이름은 싫다고 발버둥친 결과 〈소년 양치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소년 양치기〉를 극한까지 축적해 만들어낸 신병기가 바로 이번 작전의 핵심이 되는 「Poor Snow」였다.

 Poor Snow.
 천명특구한정전역무차별전격질투폭격기天明特區限定對全域無差別電擊嫉妬爆擊機. 특수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나노머신이었다.
 진공상태의 Poor Snow는 평범한 눈의 결정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기권에 노출될 경우 Poor Snow는 주변의 수분과 냉기를 흡수, 급격히 자신을 복제한다. 그리고 복제 역시 원형과 똑같은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앗 하는 사이에 Poor Snow는 천명도 전역을 뒤덮는다. 최근 연구되고 있는 나노머신 테크놀러지에 의한 인공강설계획에서는 각종 기술적 난제로 인해 완성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리라 추정중이지만, 소양은 오로지 순수한 인간의 질투심嫉妬心만으로 현실화에 성공한 것이다.
 눈이 되어 대지로 하강하는 Poor Snow는 자체에 질투병기Envy Weapon를 장착하고 있으며, 무차별로 질투광선Envy Beam을 발사한다. 질투광선에 맞은 자는 짜증을 부리거나 쉽게 화를 내게 되며, 결과적으로 옆에 있던 자와 싸우고 헤어지게 된다.
 올해 크리스마스 강설확률 0%라는 소식에 좌절하고 있던 쌍것들은 눈이 내리면 부랴부랴 튀어나올 테고, 모두 Poor Snow의 제물이 될 것이라는 게 소양의 계산이었다.

 “효과검증은 이미 마무리했고,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자기파괴가 이루어지도록 설계했어. 정부의 예지능력자들이 아직까지 경고문을 안 보내온 걸 보면 외부 개입도 없을 거고. 남은 문제는 하나뿐.”
 소양은 과시하듯 리모컨을 눌렀다. 프로젝터의 스크린이 천명도 중앙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천명도지만, 유독 눈에 띄는 고층 건물이 있다. 쌍극단에서 가장 싫어하는 건물이자 연수련에서 목숨을 걸고 지키는 상징물, 바벨이었다.

 바벨Babel.
 동양 최고층을 자랑하는 높은 탑으로서, 이런 고층 탑을 극도로 부족한 물자와 인력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연수련 최대의 위업이자 자랑거리였다.
 그 건축 동기는 ‘데이트 장소 확보’.
 천명도는 비교적 큰 섬이긴 하지만 아주 크다고는 할 수 없다. 반면 천명도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몇몇 예외(현재 47세인 학생회장이라든가)를 제외하면 혈기 왕성한 연령.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시간이 없으면 없는 대로 데이트에 몰두하는 그들에게 데이트 스팟이 부족하다는 점은 꽤나 큰 아픔이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다.
 섬을 떠날 수 없다면 하늘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수 천 명의 이능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대공사였고 성공리에 끝났다. 예정대로 천명도 안의 랜드마크이자 불가사의Wonder가 되었고, 천명도 안의 모두가 모여드는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쌍극단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원망스러운 곳이었고, 이곳을 빼앗기 위해 수십 번이나 무모한 도전이 이루어졌다. 거의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마다 쌍극단과 연수련의 전면전이 이루어졌고, 결과는 쌍극단의 전패였다.
 소양이 단장으로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이 이 바벨 공략이었는데, 올해에는 스스로 그걸 들고 나온 것이다.

 “어쩔 수 없어. Poor Snow에 중력에 역행하는 능력은 없거든. 유의미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바벨 정상에서 하늘을 향해 Poor Snow를 쏘아 올려야 해. 다행히도 Poor Snow 투사에만 성공하면 그 뒤에 내려오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모두 우리의 동료가 되어 있을 테니까.”
 길고 길었던 싸움에 대격변이 일어나리라는 예측에 회의실 안의 모두가 끓어올랐다. 소양이 거절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갈 거지, 거절? 네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니까.”
 “……이런 때는 거짓말 안 하는 게 특히 얄밉네요.”
 거절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이 거절을 하지 않다니 거절답지 않아서 정말 고마워, 거절.”
 “사람 이름 가지고 장난치면 하늘을 날게 돼요.”
 소양이 다시 한 번 공중을 날았고, 그렇게 「Poor Snow 작전」이 시작되었다.


 3.

 ─────2011년 12월 23일 밤 11시 30분─────


 「Poor Snow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바벨 공략전이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연수련 이외의 일반 입장객들도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전략 때문이라는 것이 소양의 판단이었다.
 과연 예상대로 다음 날의 대목을 준비하고 있던 몇몇을 제외하면 큰 저항을 해오는 자가 없었다. 쌍극단은 지금까지의 공략전 중 가장 손쉽게 바벨 정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공략개시 시간이 다소 일렀고, 요 몇 년 동안 이런 대공세가 없었던 것이 방심을 불렀을 것이다.
 거절은 설마 이 모든 것이 소양의 책략이었던가 하며 감탄하고 말았다.


 ─────2011년 12월 24일 새벽 5시 30분─────


 그러나 손쉽게 진군할 수 있었던 건 정문까지 뿐이었다. 바로 그 정문에서 쌍극단은 좀처럼 전진할 수 없었다. 그 정문에 서어 있는 것이 바로 호로관 메뚜기……가 아니라 연수련 삼환신三幻神 중 하나인 환영술사幻影術士 슈랜〈Sugar Land〉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옆에 있는 상대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로 보이게 하는 이능. 아무런 생각 없이 환영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 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의 이름을 외치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당연히 전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고, 원거리에서 그걸 보고 있던 자들 중 멘탈이 붕괴하는 케이스가 증가했다.
 개중에는 ‘후후후, 역시 A씨는 B씨에게 마음이 있었어.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깐?’하며 좋아하는 케이스도 있었지만.
 “정신 차려! 이건 환상이야! 느닷없이 이런 곳에 그 애가 나타날 리 없잖아! 그 애는 모니터 속에서 못 나온다고!!!”
 간혹 냉정함을 유지하는 쌍극단원도 있었지만 스스로 한 말에 피를 토하며 쓰러져버렸다. 환영술은 현실과 모순이 발생하면 깨어져야 하지만, 오히려 피해자들이 거기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애쓰며 환상에 취하려 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증원, 별동대로서 후열에 버티고 있던 거절이 이를 악물었다.
 “제가 가겠어요.”
 “안 돼. 넌 지금 우리 쪽의 최고 전력인걸. 이런 곳에서 소모시킬 수는 없어. 차라리 희생을 감수하고 원거리 포격으로…….”
 소양이 거절을 막아섰다. 거절의 눈에 불쾌감이 스쳤다. 전투에는 걸맞지 않은 체질이라 만류했는데도 억지로 따라붙더니, 반대로 이번에는 그녀를 막아서고 있다. 게다가 이런 말조차 진심이 아닌 것인지 스파크가 일어나 손끝이 따가웠다.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단장님. 저는 그렇게 복잡한 계산은 못 해요. 이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밀쳐내고서라도 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자 소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래그래. 거절 양은 내 말이라면 아무튼 거절하고 보는 걸. 그럼 같이 가자. 설마 자기는 고집 부리면서 저는 안 된다고 하진 않겠지?”
 거절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무투파인 그녀와 온건파인 소양. 이건 단순히 정치적인 부분의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전투에서도 그 차이는 명백했다. 그걸 뻔히 알고 있는 소양이 함께 가자고 하는데, 이번에는 또 거짓말이 아니다.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면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소양이 따라 붙기 전에 환영술사 슈랜을 격파하면 되는 거다.
 환영술의 범위 안에 돌입했을 때 거절의 눈앞에 예전에 헤어졌던 연인들이 나타났다. 먼저 고백한 경우도 있고, 고백을 받은 경우도 있고, 문득 깨닫고 보니 연애였던 경우도 있다.
 거절은 그 상대들을 모두 잊지 못했다. 용서도 할 수 없었다.
 시야가 하얗게 불타올랐다. 착각이 아니라 실제였다. 바벨의 정문에 펼쳐진 슈랜의 환영술, 다시 말해 ‘거짓말 덩어리’가 거절과 접촉해 강렬한 스파크를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능 〈거짓말 절단기〉.
 그 보유자는 거짓말과 접촉했을 때 독특한 형태의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다. 백색 스파크의 형태로 가시화可視化된, 순수한 분노로 끓어오르는 전격을 체내에 축적하는 것이다. 임계점을 넘은 분노는 방출되어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신의 일격이 된다.
 땅에서 하늘을 향해 내리꽂히는 백색 전격은 거절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거절이 난입하기 1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환영술사 슈랜은 〈거짓말 절단기〉에 직격당해 완전히 의식 불능이 되고 말았다. 쌍극단원 중에서도 그 전격에 휘말려 든 자가 부지기수였지만, 자주 맞곤 하는 전격이었기 때문에 그 회복은 비교적 빨랐다.

 다시 한 번 소개하도록 하자.

 거절.
 이능 〈거짓말 절단기〉 보유자.
 나이 17세, 학업평가 A+, 그러나 이능의 제어력을 테스트하는 졸업시험에서는 매번 0점. 평생 졸업할 수 없으리라는 선고를 받고 있다.
 3회의 연애 경험 보유. 단 매번 거짓말하는 상대방을 전격으로 구워버리며 끝났다는 화려한 전적. 이후 인간과 연애에 대한 깊은 불신에 빠져 쌍극단에 투신, 무투파의 정점에 선 소녀.
 적도 아군도 많으나, 그 어느 쪽에게서도 깊은 신뢰를 받고 있다. 타인의 거짓말을 용납 못하는 이상으로 자신의 거짓도 용서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다소는 안타까워하는 빛도 섞여 있지만.


 4.

 ─────2011년 12월 24일 오후 4시 20분─────


 거절은 생각했다.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난다면 그건 분명 자신의 탓일 거라고.
 슈랜 한 명에게 막혀 진군이 가로막혔던 그 시간 동안 바벨 내의 연수련 회원들은 방어태세를 갖추고 외부 지원을 끌어들였다. 조금 더 빨리 슈랜을 돌파했어야 했다.
 아니라면 차라리 소양의 제안대로 아군의 희생을 감수한 원거리 포격으로 슈랜을 격파, 자신의 체력을 남겨두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바벨 4층에 포진하고 선 적, 연수련 삼환신 중 또 한 명 네랜〈Never Land〉을 단시간에 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내부 방어군과 외부 지원군 사이에 협공당하는 꼴을 당하지 않고도!
 아니,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른다. 삼환신 중 슈랜에게는 전승, 미랜에게도 7:3의 승률을 자랑하는 거절이지만 네랜과의 전적은 5:5로 박빙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승리는 튼튼한 몸을 믿고 자폭에 가까운 공격을 감행한 끝에 얻은 것이었고.
 네랜은 본래 쌍극단 소속이었던 환감술사幻感術士. 그 이능은 그 주위에 자신의 감정을 전파시키는 것. 지금 네랜이 뿌리고 있는 감각, ‘어차피 나는 영원히 혼자야’에 대해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바벨을 습격한 쌍극단의 단원 중 누구도 그 감각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거짓말 절단기〉도 작동하지 않는다. 거절도 그 감각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 하다못해 컨디션만 멀쩡했다면 어떻게든 덤벼 볼 텐데, 슈랜과의 싸움에서 체력을 너무 소모했다.
 그녀가 그렇게 후회하는 동안에도 협공을 받은 쌍극단원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갔다. 그리고 상층으로의 통로를 지키며 감정 감염에만 열중하던 네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거절을 지키기 위해 앞을 막아섰던 부하들이 네랜이 뿌려낸 감각에 좌절해 쓰러져나갔고, 거절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어도 무릎 끓은 채 네랜을 올려다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안녕하십니까, 거절 양. 잘 지내셨습니까?”
 “배신자인 당신이 멀쩡한데 제게 문제가 있을 리 없잖아요?”
 네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충실한 쌍극단 소속입니다. ‘연애는 기만이고 사랑은 착각일 뿐’이라는 쌍극단의 강령을 신봉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걸핏하면 사랑의 힘이니 뭐니로 저항해오는 연수련 녀석들보단 그대들 쪽이 괴롭히는 맛이 있을 뿐입니다.”
 무엇인가 쏘아붙여야 할 텐데 기운이 나질 않았다. 무기력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싸움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동지가 늘어난다고, 쌍극단의 강령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그녀는 혼자일 뿐이었다. 모두가 들떠 신나하는데 자신만이 버려진 것 같아서 심통을 부리는 것뿐이었다. 〈거짓말 절단기〉는 어째서 발동하지 않는 걸까. 왜 자기를 태워버리지 않는 걸까. 질투라는 감각조차도 사실은 거짓말.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진짜 감정은 분명히 체념과 자포자기, 그리고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일 텐데.

 네랜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피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아서 그냥 눈을 감았다.
 거리를 두고서도 이렇게 강한 아픔을 뿌리는 〈Never Land〉.
 접촉했을 때 어느 정도로 괴로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너, 거절에게 손대면 죽인다.”

 예상도 못했던 목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피투성이가 된 소양이 그녀와 네랜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단장님? 한참 전에 도망치지 않았었나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도망 친 거 아니야! 필사적으로 달리는데 두고 갔잖아! 난 너희 같은 체력계가 아니거든?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숨었다가 죽은 척했다가 같은 편인 척했다가!”
 스파크가 일어나지 않는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야 거절 너와 소중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서지!”
 스파크가 일어났다.
 “…….”
 “…….”
 “그래서 절 어떻게 막을 셈입니까, 소양? 아니, 어떻게 제 이능의 감염범위 안에 있으면서 그렇게 태연합니까?”
 소양은 웃었다.
 평소라면 질색했을 터인 그 피식거리는 웃음이 이상하게 눈부셨다.
 “쌍극단 최악의 폭탄으로 불려온 나를 얕보지 마! ‘어차피 나는 영원히 혼자야’? 그게 뭐! 난 늘 그런 기분으로 살고 있어! 항상 그런 기분이라고!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 좀 들었다고 영향이나 받을 것 같아?!”
 스파크, 안 일어났다.
 네랜의 얼굴에 쓴 웃음이 피어났다.
 “그렇습니까. 동지였습니까.”
 “하지만 너와는 달라! 나에게는 엄청난 목표가 있어!”
 암울하게 죽어 있던 네랜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생겨났다. 소양은 재빨리 뛰어들어 그의 귀에 무엇인가 속삭였다. 극히 짧은 한 마디였는데도 네랜이 크게 동요했다.
 “진심입니까? 그대가 정말 동지라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그러니까 할 수 있어! ‘어차피 나는 영원히 혼자’니까, 도전해 볼 수 있는 일도 있는 거야!”
 거절을 괴롭히고 있던 절망감이 갑자기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감각변화에 놀란 거절이 네랜을 바라보자, 그의 눈에는 어떤 결의가 떠올라 있었다.
 “알겠습니다, 동지여. 그대의 용기에는 감복했습니다. 연수련도 쌍극단도 저에게는 괴로운 집단일 뿐이었으나, 예정된 패배에 바치는 헌사로서 이 순간만큼은 그대를 돕겠습니다.”

 네랜은 느닷없는 재전향을 선언하고 쌍극단에 합세해 연수련에 맞서기 시작했다. 방금까지의 강적이 단 한 순간에 아군이 되는 기적에 쌍극단의 사기는 크게 오르고, 반면 연수련의 사기는 급격히 하락했다.
 남은 관문은 미랜 혼자뿐. 그러므로 더 이상의 숫자는 필요 없을 것이라고 네랜은 말해주었다. 후방의 추격을 막기 위해 전력을 모두 뒤에 남기고, 거절과 소양만이 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말이었던 거죠? 어떻게 그를 끌어들인 거예요?”
 거절의 질문에 소양은 언제나처럼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냥 거짓말 한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난 그게 특기잖아.”
 스파크가 일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 거짓말이어서, 거절의 머리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5.

 ─────2011년 12월 24일 오후 6시 17분─────


 연수련 삼환신 중 마지막 한 사람, 진언술사眞言術士 미랜〈Miracle Land〉.
 미랜은 다른 자들과 달리 거절과 소양을 막아서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단을 비켜주고 충고를 해 주었다.
 “이 계단 끝은 바벨의 정상. 이 천명도에서 가장 높은 곳이죠. 방문자가 너무 몰리면 곤란하기 때문에 1년에 단 한 커플에게만 개방되지요. 여러분들이 어젯밤부터 소동을 피우시는 바람에 추첨이 취소되었으니까, 여러분들이 대신 들어가셔도 좋아요. 다만.”
 미랜은 말했다.
 “계단 끝에 있는 문은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만 열린답니다. 아시겠지요? 저는 매일 저 문에 대고 진언을 불어넣었어요. ‘사랑하는 두 사람만이 이 문을 열 수 있다’고. 그 사실만은 염두에 두시길 바라요. 그렇지 않으면 저 문은 여러분들에게 결코 열 수 없는 통곡의 벽이 되고 말 테니까요. 그럼 전 데이트가 있어서 이만.”
 그리고 미랜은 총총걸음으로 관문을 떠났다.
 “……저 사람 공격하고 싶어요.”
 “그만둬. 안 막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잖아.”
 거절과 소양은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계단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양 최고층을 자랑하는 바벨에는 사소한 트릭이 있었는데, 그것은 천명도 안에 있는 학생들과 상인들만으로는 내부를 모두 채우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탑 하부를 제외하면 전부 빈 공간에 계단만이 뚫려 있었다.
 계단을 오르고 1시간이 지났을 때 거절은 생각했다. 이건 서로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니면 분명히 오르다가 ‘누가 여기 오자고 했어!’라고 외치며 서로를 죽이려 들게 분명한 높이라고.
 2시간이 지났을 때 거절은 생각했다. 서로 엄청나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도 서로를 죽일 높이라고.
 3시간이 지났을 때 거절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탑은 연수련이 아니라 쌍극단에서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4시간이 지났을 때 거절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5시간이 지났을 때 거절은 계단에서 미끄러졌다. 계단 끝까지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것은 힘겹게 따라 오르던 소양이 그녀의 팔을 간신히 잡아채 주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기운이 빠져 있었기에 함께 구를 위기였지만, 그녀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 간신히 버텼다.
 “괜찮아?”
 “예……? 예!!!”
 소양의 폼에 안긴 자신을 자각한 거절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뗐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뭘 그런 걸로 얼굴까지 붉히고 그래?”
 “자기 얼굴 상태를 보고 말씀해주세요.”
 가볍게 핀잔주는 소양을 향해 거절이 받아쳤다. 소양은 의아해하며 자기 얼굴에 손을 댔고, 잠시 후 그 얼굴이 더 빨갛게 되었다.
 “……비밀로 해줘.”
 “단장님 하는 걸 봐서요.”
 거절은 쿡쿡 웃으며 답했다. 위기의 순간 다음이라서인지 멍해졌던 머리가 다소 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얘기라도 할까요?”
 “응? 무슨 얘기?”
 “아무 얘기나요. 이대로 가면 계단 오르다 잠들어버릴 것 같으니까, 뭔가 이야기를 하면 좋지 않을까요.”
 “그, 그래? 무, 무슨 얘기가 좋을까?”
 “아까부터 왜 그렇게 더듬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런 거 없었는데…….”
 파직파직 하고 거절의 손끝에서 스파크가 솟아올랐다. 그 손끝을 소양에게 보이며 배시시 웃자 소양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되었다.
 “평소의 거짓말쟁이는 어디로 간 거예요, 단장님? 왜 이렇게 반응이 재미있어요?”
 “뭐? 나, 난 평소랑 똑같거든?”
 파직파직.
 “저 거짓말 싫어하시는 거 아시죠? 게다가 더 쌓이면 폭발할지도 몰라요. 사실대로 말하세요, 단장님.”
 “거절 너, 평소랑 좀 다르다? 원래 이렇게 말 많은 애가 아니었잖아?”
 반문은 거짓말이 아니다. 잘 골랐구나 생각하면서도 거절은 사실대로 답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단순하니까, 기분이 좋으면 말이 많아지고 기분이 나쁘면 말이 줄어들 뿐이에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괜찮은 거야?”
 “잘 모르겠어요.”
 살짝 스파크가 일었지만 소양에게 보이지 않도록 감추었다.
 너무 힘들게 움직이다보면 엔돌핀이 과다 분비되어 쾌감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계속 유쾌한 기분이 드는 건 분명히 그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냉정히 평가하는 자신이 있다. 아까 네랜을 만나 감정이 극한의 마이너스 상태에 빠졌다가 회복된 이후부터, 정확히는 네랜에게서 자신을 지키듯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본 다음부터 이 기분이 시작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절은 공세에 나섰다. 눈치 빠른 소양이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 돌리지 마시고, 언제부터 말 더듬기 시작했는지 좀 생각해 보세요. 제 생각에는 아까 계단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끄응. 신경 쓰여서 그래! 신경 쓰여서! 됐어? 좁은 계단을 둘이서 오르니까 신경 쓰인다고! 그것도 앞에서! 엉덩이라든가 허벅지라든가 종아리라든가 발뒤꿈치라든가! ……또 넘어지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전반부에서는 얌전, 중반부에는 스파크가 일었지만 후반에는 잠잠. 엉덩이라든가 허벅지라든가 종아리라든가 발뒤꿈치가 아닌 다른 곳을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사실 약간 불쾌한 이야기였지만 뒷부분은 진심이었던 것 같아서 화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거절은 용기를 내서 손을 내밀었다.
 “잡으세요, 단장님.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누가 쓰러질지 모르고, 제 때 못 잡아주면 큰일 날 테니까요. 같이 가면, 신경도 덜 쓰이시겠죠?”
 “……잡귀야 물럿거라!!!”
 스파크 없음. 소양은 진심으로 귀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거절은 필생의 인내심을 발휘했고, 엄청나게 참고 있는 중임을 눈치 챈 소양이 잽싸게 그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남은 계단을 계속 오르기 시작했다.
 손을 잡은 다음부터 거절도 소양도 말수가 극히 줄었지만, 정신만은 지금까지의 몇 배로 맑아졌다.


 ─────2011년 12월 24일 오후 11시 49분─────


 계단의 끝에 도착했다.
 계단 끝에는 이상할 정도로 녹슨 낡은 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일단 밀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우윳빛 장막이 드리워지더니 접촉 자체를 막아버렸다.
 미랜의 진언은 ‘절대의 법칙을 만드는 것’. 선언가능한 것은 단 하나의 법칙뿐이므로 개인을 쓰러뜨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실로 곤란했다. 시간을 들여 계획을 짜내야겠지만, 언제 추적자가 올지 모른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거절은 물었다.
 “단장님. 절 좋아하시나요?”
 간신히 계단이 끝난 것에 안도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소양이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어? 조, 조금……?”
 스파크가 일었다. 빠직.
 거절은 살짝 마음 한 쪽이 아파오는 걸 느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어째서인지 소양이 조금 신경 쓰이게 되었지만 갑작스럽게 생겨난 이 감정이 그렇게 깊을 리 없다.
 그러니까 미랜이 말한 것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으로서 이 문을 통과할 수는 없다.
 “잠시 물러나 계세요. 힘으로 해보겠어요.”
 “뭐? 무리야! 미랜의 능력은……!”
 “‘문을 열 수 없다’지 ‘문을 부술 수 없다’가 아니니까요. 게다가 여기에서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이렇게 좁은 곳에서 네 능력 터트렸다간 네가 어떻게 될지 몰라! 안 돼! 난 반대야!”
 거절은 웃었다.
 평소에는 매일 얄미운 짓만 하더니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도 귀여운 걸까. 〈거짓말 절단기〉의 인증을 받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소양은 지금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전 시험해보고 싶어요. 단순하니까 그렇게 복잡한 계산은 못 하고요. 물러나 계세요.”
 문에 손을 뻗고 머릿속에서 말을 생각했다. 무슨 말이 좋을까. 어떤 말이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거짓말’일까. 어떤 말을 하면 〈거짓말 절단기〉의 최대출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소양뿐이었다. 소양은 언제나의 웃음을 지우고, 그녀가 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 응원할게.”
 “……단장님?”
 “어차피 네가 해내지 못하면 실패잖아.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느니 옆에서 응원할게. 안 되면 같이 벼락 맞지 뭐. 난 괜찮아. 후회 안 할 거야.”
 애석하게도 괜찮다는 말에 〈거짓말 절단기〉가 발동했다. 소양이 입술을 깨물었고 거절은 웃었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거절은 거짓말을 결정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결코 긍정할 수 없을 거짓을 찾아냈다.
 그것이 거짓이라 드러나는 게 어떤 의미일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단순하다.
 복잡한 계산은 할 줄 모른다.
 그러니까 입을 열어 당당하게 거짓말했다.

 “연애는 기만,
 사랑은 착각이죠.
 결국 저는 영원히 혼자예요.”


 〈거짓말 절단기〉는 사상 최대의 거짓말과 접촉했다.
 〈거짓말 절단기〉는 사상 최대의 거짓말에 반발했다.
 〈거짓말 절단기〉는 사상 최대의 출력치에 도달했다.

 〈거짓말 절단기〉는 발동했다.
 문은 박살나지 않았지만 벽은 박살났다.


 거절은 이능 〈거짓말 절단기〉의 보유자였다.
 그것은 모든 거짓을 간파한다는 뜻이며, 어떻게 해도 그것을 감출 수 없다는 의미였다. 거짓말을 일정량 이상 축적한 〈거짓말 절단기〉는 자동으로 반발해 발동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단순한 자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좋아하는 것은 좋아한다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한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 자신 또한 〈거짓말 절단기〉의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그녀에게 연애는 결코 행복한 경험이 아니었다. 장난으로 하는 거짓말도, 기쁘게 하기 위한 거짓말도, 슬프지 않게 하기 위한 거짓말도, 〈거짓말 절단기〉는 종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 거짓말로 파악한다.
 누군가를 잘 만날 수가 없었고, 헤어지는 것은 특히 어려웠다. 자신에게 연심이 남아 있는 동안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고, 자신에게서 연심이 떠났다면 그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3회의 실패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쌍극단의 강령과 같았다. 연애는 기만이고 사랑은 착각.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서글퍼서, 결국 자신은 영원히 혼자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변하는 법이고, 한 때는 절대의 진실이었던 것이 결코 믿을 수 없는 거짓이 되기도 한다.
 거절은 그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최대 출력으로 발동한 〈거짓말 절단기〉의 위력은 반경을 전부 날려버리기에 충분했고, 거절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웃고 있을 것이라고.

 6.

 ─────2011년 12월 24일 오후 11시 57분─────


 거절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있었다. 바벨의 정상, 이 천명도에서 가장 높은 장소였다. 구름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느낌에 그녀는 아연해졌다. 어딜 봐도 건물 위가 아닌 하늘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기에.
 자신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 순간은 확실히 무서웠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관람대 아래를 응시했다. 바로 아래의 천명도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어울리는 불길로 밝았고, 먼 바다 저편에도 환한 불이 무수히 켜져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져서, 올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자신의 몸 위에 소양의 점퍼가 덮여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소양은 준비해 온 투사장치에 Poor Snow가 든 캡슐을 설치하고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단장님……?”
 “아, 일어났어? 잠깐만 기다려. 이제 발사할 테니까.”
 “그만두세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낮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한 걸까, 소양은 고개를 돌리며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웠다.
 “그만두세요. 바보 같은 일이니까요.”
 “응?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바보 같은 일이잖아요. 억지로 커플을 찢거나 하는 거 말이에요. 어차피 대부분은 헤어지게 되어 있잖아요.”
 “……?!”
 소양은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이는 지상을, 사실은 괴로운 사람들도 잔뜩 있을 지상을 내려다보며 계속 말했다.
 “저 말이에요, 계속 바보 같은 짓을 해 왔는데, 생각해보면 역시 차인 게 억울해서 그랬던 것뿐이었어요. 제가 잘 안 된 게 억울하니까, 남도 그렇게 돼라……는 생각으로 날뛰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혼자는 싫다, 혼자는 무섭다……고.”
 그래서 쌍극단에 들어갔던 거다.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비슷한 바보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안심이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역시 투정인거고, 기회만 되면 언제라도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아니, 반대일지도 몰라요. 제발 그럴 기회가 오기만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쓸쓸하다는 걸 정말 잘 아니까.”
 쓸쓸함에 익숙해지는 건 불가능하다. 계속해서 약해질 뿐이다. 우연히 다가온 손길에 두근거려하고, 서두르다가 실수를 저지르고, 그 기회를 놓쳐 다시 좌절한다.
 그래도 역시 바라고 있다. 자신만 제외한 모두가 행복한 것 같은 크리스마스라도, 뭔가 기쁜 일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걸 뿌려봤자 좋은 일은 전혀 생기지 않아요. 모두가 괴롭게 될 뿐이니까 그만두세요. 차라리 내려가서 패전 위로 모임이라도 해요. 저, 지금이라면 웃으면서 분위기 띄울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요.”
 네? 부탁해요, 단장님.

 어색하게나마 애교를 담아 속삭인 말 때문에 소양에게 경기가 들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손에 들려있던 투사장치가 땅에 떨어지더니, 하늘을 향해 Poor Snow가 든 캡슐을 쏘아올렸다.
 “다, 단장님?!”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캡슐은 지정 고도 이상에 도달하자 자동으로 분쇄되었다. 캡슐 안에 들어 있던 육각형의 백색 결정이 허공을 날았다. 놀랄 정도로 반짝이던 백색 결정은 공기에 반응해 크기를 늘리고 구름을 생성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는 사이에, 눈구름은 천명도 일대를 뒤덮었다.
 눈구름은 엄청나게 신속하게 함박눈을 펑펑 떨구기 시작했다. 단 몇 분 지났을 뿐인데도 천명도의 하늘은 눈으로 가득 찼고, 소식 없던 눈이 느닷없이 쏟아지자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며 잠들었던 아이들이, 산책 중이던 커플들이, 크리스마스 따윈 엿이나 먹으라며 가짜 주민등록번호로 접속한 게임에 열중하던 소년들이, 이렇게 눈이 쏟아지면 대체 누가 치우는 건지 아느냐며 짜증내던 메이드 하란 양이, 마감을 겁내 집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던 작가가, 그 작가의 집 문을 망치로 두드리던 편집자가,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쏟아지는 눈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시연 영상에 있었던 질투빔 따위는 날아다니지 않았다.
 전혀.
 네버.

 “……단장님?”
 “어? 뭐, 뭘까……. 불량품인가?”
 스파크가 파직파직.
 거절의 안면 혈관도 빠직빠직.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 안 하시면 던지겠어요.”
 “그, 그게……!!!”
 거짓말쟁이라는 걸 자랑거리로 삼던 소양이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맸다. 그 시선이 자기가 걸치고 있던 소양의 점퍼에 쏠린 걸 깨달은 거절이 잽싸게 움직였다.
 점퍼 안에는 소양의 발명수첩이 있었다.
 다급히 페이지를 넘기던 거절이 유독 모서리가 많이 닳아있는 페이지를 찾아냈다.

 〈Project Pure Snow〉
 2009년 01월 01일 : 올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거절에게 고백한다.
 2010년 01월 01일 : 올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거절에게 고백한다.
 2011년 01월 01일 :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억지로 눈이 오게 해서라도 거절에게 고백한다!!!

 그녀는 잠시 캄캄해진 시야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생각해보니 소양이 Project Poor Snow인지 뭔지 하는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강설확률 0%라는 보도가 있었던 날 저녁이었다.
 끓어오르는 기분을 억지로 참고 소양을 향했다.
 “단장님. 이게 대체 무슨 계획이죠?”
 “어, 그, 그게……, 거절은 워낙 열성단원이니까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적어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 내리는 바벨 정상 정도가 아니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거절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아까 전에 제가 저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거짓말 판정 나왔는데요.”
 “그, 그야……. 조금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엄청 좋아하는 걸! 진짜로 엄청나게 좋아하는 걸! 솔직히 보고 있으면 제대로 숨도 못 쉴 정도로 좋아한단 말야! 거, 거짓말로 위장하지 않으면 제대로 말도 꺼내기 힘들 정도로 좋아한다고!!!”

 〈거짓말 절단기〉에 반응 없음. 진실.
 그러나 진실이 항상 발언자의 생명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랬군요, 단장님. 전 그만 그것도 모르고…….”
 거절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소양의 손을 꽉 잡았다. 새까맣게 죽어가던 소양의 눈에 희망이 빛이 떠올랐다.
 “거, 거절?”
 “거절 안 해요. 저는 단장님을 아주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이 세상 누구보다 좋아해요. 단장님이 없으면 죽어버릴 정도로 좋아해요.”

 〈거짓말 절단기〉는 다시금 사상 최대의 거짓말과 접촉했다.
 〈거짓말 절단기〉는 다시금 사상 최대의 거짓말에 반발했다.
 〈거짓말 절단기〉는 다시금 사상 최대의 출력치에 도달했다.

 〈거짓말 절단기〉는 다시금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발동했다.

 소양은 빛이 되었다.


 X.

 정신을 잃은 소양을 보며 거절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양에게 화낼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조직을 배반할 마음은 먹은 건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그냥 조금만 솔직했다면…….

 거절은 자신의 솔직함도 확인해보기로 했다.
 “단장님이 좋아요.”
 스파크가 일었다.
 “단장님이 싫지 않은 것 같기도 해요.”
 스파크는 일지 않았다.

 거절은 쓰러진 소양을 질질 끌어 계단으로 향했다. 이런 기분이라면 잘하면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살짝 내려다본 아래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려 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거절소양의 Poor Snow, 終.

『일편흑심』 3권이 나왔습니다. & 근황.



 올리는 게 많이(..) 늦었습니다만, 『일편흑심』 3권이 발매되었습니다.
 어째서 이리도 올리는 것이 늦었느냐면 그것은 어른의 사정……은 쥐뿔이고(..), 정식 발매일이 되면 포스팅해야지~ 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 새 지금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라서 좋아한 게 아니고, 좋아한 게 남자였던…… 그런 건 아니고, 이것저것 바쁜 일이 많아서 이리저리 휘둘리다보니 벌써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ㅠㅠ

 3권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 4컷과 같습니다.

 내용에는 이래저래 다소 위험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제가 뭘 쓰고 있는지 잊어버린 것은 아니고(..), 카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만 변명은 죄악. 여러분 중 태어나서 단 한 번이라도 죄를 지으신 분들은 저를 마음 껏 쳐주세요(..).
 그리고,
 『엔딩 이후의 세계』에 헌정 단편과 추천사를 썼습니다.

 헌정 단편이라니? 추천사라니? 매우 주제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미 저질러버렸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된 계기에는 물론 깊은 배경이 있는데…….

 #1.
 어느날, 편집장님과 전화로 이야기하던 중.
 편집장님 : 류세린님의 『엔딩 이후의 세계』가 11월에 나올 예정이네요.
 저 : 네.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팬이었거든요! >_<
 편집장님 : 그래요. 홍보라든가 부록이라든가에서 뭔가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얘기해주세요.
 저 : 네! 아, 팬픽이라도 쓸까요! (<- 당연히 농담)
 편집장님 : 그래요. 그거 말고도 뭔가 좋은 생각 있으면 연락주세요.
 저 : 네~. (전화 끊음)

 그리고 며칠 후. 류세린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랬습니다. 편집장님 앞에서 '쓸까요!'는 '쓰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게 해주세요!'의 의미였던 거예요.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2.
 그래서 팬픽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엔딩 이후의 세계』에서 '야니'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시하 군이 야니와 데이트 하는 광경을 써보려고 생각했습니다. 야니와 함께 집에서 놀고, 뿌요뿌요를 하다가 잠시 찢어질 뻔하고(..), 안되겠다 싶어서 기분전환하러 나왔다가 게임 센터에 들어가고, 요샌 한물 간 댄스게임을 권유하지만 야니가 부끄러워하고, 그걸 뒤늦게 눈치 챈 시하가 미안해하고, 함께 퍼즐보블을 하다가 게임이 보기엔 평화로운데 실제로는 사악하기 그지없어서 마음 상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폭력넘치는 대전격투 게임을 하기로 하고, 야니는 철권하고 시하는 조언하고, 야니가 도전자에게 패하고, 시하와 야니가 각각 레버와 버튼을 맡아 사랑과 우정의 2인 1조 플레이로 도전자를 박살내고, 눈꼴시려한 새 도전자가 나타나고, 질투갓 랭크의 새 도전자는 시하와 야니를 이기고, 굴욕적인 연패를 당한 끝에 역시 이 방법으로는 입력오차를 줄일 수 없다고 인정한 시하는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해!'를 외치며 야니를 자기 무릎 위에 앉게 하고, 스틱과 버튼에 놓인 야니의 손 위에 자기 손을 합쳐서, '야니, 낭군님이라면 그저 조종당하는 인형일 뿐이라도 좋사와요낭군님낭군님낭군님낭군님낭군님낭군님낭군님낭군님낭군님', '조종이라니! 인형이라니! 당치도 않아! 우리는 지금 서로의 움직임을 조율하고 있는거야니야니야니야니야니야니야니야니야니야니'를 외치고, 그렇게 대전에 몰입하는 도중에 의자 다리 한쪽이 부러져서 넘어질 상황에 처하지만 그랬다간 혹시 야니가 자기가 무거워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까 싶어 시하는 비기 '에어 체어'로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야니를 지탱하는…… 그런 이야기요.
 정리해놓고보니 안 써서 다행이네요.

 #3.
 아무튼 저 기획을 폐기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아무래도 갓 1권 나온 상태에서 들어가는 글이라 혹시 읽는 분들에게 잘못된 인물상이 전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본편 시작 이전, 주요 인물들이 아니라 그 인물들을 곁에서 관찰하는, 그리고 이왕이면 적측의 인물! 이라는 느낌으로 단편을 썼습니다.
 썼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쓸데없이 의미있는 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뭐하는 거냐 김인실! 어딜 봐도 그냥 엑스트라의 위치와 위상이 아니잖아?! 잘못된 인물상을 전하면 어쩌나 싶어서 이 내용으로 간 건데 폐를 끼치는 정도가 더 늘었어? 이게 팬픽이냐, 다른 분 글에 멋대로 자기 캐릭터를 들이민 거지?!
 ……같은 상황.
 류세린님이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긴 했지만 굉장히 폐가 되는 짓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ㅠㅠ

 #4.
 여담 둘.
 하나는 『엔딩 이후의 세계』 발매 이후 알게 된 것입니다만, 저 외전에서 쓴 모 캐릭터의 설정이 유명한 특촬물 시리즈의 주인공 누군가(..)와 겹치는 것 같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하드보일드/하프보일드의 호칭이……. 못 믿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보지 않은 시리즈입니다. ㅠㅠ 제가 그 작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XXXXX의 아이젠보그라든가, 변신할 때 '사이클론--- 쇼커!'라는 소리가 나온다든가(쇼커가 아니라 조커라는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ㅠㅠ), 한 명이 싸울 준비를 하면 한 사람은 잠을 잔다든가 하는 정도였어요. ㅠㅠ 일부 클립만 본 정도였다구요. ㅠㅠ
 성격도 의미도 다르기 때문에 아마 문제가 되진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만(;), 혹시나 문제가 된다면 그 책임은 제게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두번째는 사소한 우연.
 외전의 각 챕터는 1권 시작에서 며칠 전인가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368(본편 시작 368일 전)에서 시작합니다. 이 숫자는 일단 1권에 설명된 내용들을 기반으로 감으로 쓰고(..), 차후 류세린님의 교정을 받았습니다만…… 챕터 중 어떤 인물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 있었던 시기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_< 이것이 사랑이구나~♡ 하고 기뻐할 수 있었지요!


 자기 글보다 다른 글 이야기가 더 길어져버렸습니다만(..), 이전부터 류세린님의 글을 아주 좋아했었기 때문에 좀 들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행히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고, 덕분에 제 모자란 글도 가려질 듯 하여 안심. 추천사(..)로 쓴 말이 오글거린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ㅠㅠ), 이 작품에 대해 제가 느낀 감상을 가장 솔직하게 썼습니다.
 후속권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편흑심』 4권은…… 노코멘트(..). 죽여주세요. ㅠㅠ 최대한 빨리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ㅠㅠ

1 2 3 4 5 6 7 8 9 10 다음